지난해 한국의 대(對)미국·일본 수출액 합계는 1447억 달러로 대중국 수출액(1428억 달러)을 17년 만에 앞질렀다. 지난해 12월에는 대미국 수출액만으로도 2003년 6월 이후 20년 만에 대중국 수출액을 제치기도 했다. 무역수지 측면에서도 한국은 지난해 미국을 상대로 사상 최대 규모의 무역 흑자(445억 달러)를 올린 반면 중국과의 교역에서 1992년 수교 이후 처음으로 무역 적자(-180억 달러)를 기록했다. 미중 전략 경쟁 격화로 ‘차이메리카 시대’가 끝나가면서 한국의 무역 구조도 일대 지각변동에 들어간 셈이다. 차이메리카는 중국(China)과 미국(America)의 합성어로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제시한 개념이다. 중국은 값싼 상품을 미국에 수출해 달러를 벌어 미 국채를 사들이는 대신 미국은 낮은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를 유지하는 식의 두 나라 간 경제적 공생 관계를 뜻한다.
차이메리카의 붕괴 움직임으로 글로벌 무역 패러다임이 급변하고 있다. 미국은 2018년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폭탄 관세’ 부과를 시작으로 기술 봉쇄, 수출통제 강화, 투자 제한 등 중국에 대해 전방위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중국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30여 년간의 고성장을 바탕으로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자 위기 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반도체 등 첨단 전략 산업에서 중국을 배제한 자국 중심의 새로운 공급망 구축을 본격화하고 있다. 서방 기업들도 중국 정부의 ‘제로 코로나’ 봉쇄 정책 장기화로 현지 공장이 극심한 물류난을 겪자 생산 거점을 분산시키는 등 ‘탈(脫)중국’ 전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은 이 같은 공급망 재편 작업이 디커플링(탈동조화)이 아닌 디리스킹(탈위험화) 차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과의 경제·무역을 전면적으로 분리할 의도가 없고 단지 안보 관련 첨단 기술을 보호하기 위한 ‘좁은 마당의 높은 울타리’ 전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든 글로벌 무역 질서에서 디커플링이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수입한 금액은 전년보다 208억 달러 늘어난 4756억 달러에 이른 반면 중국으로부터 수입액은 전년보다 20%나 줄어든 4272억 달러에 그쳤다. 2002년 이후 21년 만에 미국의 최대 수입국이 중국에서 멕시코로 바뀐 것이다. 특히 지난해 미국의 대중국 무역 적자는 2794억 달러로 전년보다 1029억 달러(26.9%)나 급감했다. 미국 기업들도 대중국 투자를 줄이는 추세다. 2022년 미국의 대중국 해외직접투자(ODI)는 80억 달러로 2005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미중 무역 갈등은 미국의 우방국 가운데서도 한국과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지난해 중국 전체 수입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6.3%로 전년의 7.4%보다 1.1%포인트 하락했다. 한중 수교 이듬해인 1993년(5.2%) 이후 30년 만에 최저치다. 중국의 산업 고도화 작업으로 한국 기업의 현지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데다 미중 갈등의 여파에 한국 기업들이 미국 진출을 늘렸기 때문이다. 지난해 일본의 대미 수출도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4년 만에 대중 수출을 앞질렀다.
중국 경제가 부동산 위기 등으로 둔화하고 있는 데다 미국의 견제가 본격화하면서 중국 경제의 미국 추월 가능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JP모건체이스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명목 기준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8.4%로 1위를 기록했다. 반면 중국 비중은 20%로 전년보다 줄면서 1994년 이후 처음으로 뒷걸음질 쳤다.
◇中 ‘홍색 공급망’ 등 대응 전략 정비
미국·유럽연합(EU) 등 서방의 견제 강도가 높아지면서 중국도 반격 전략을 촘촘히 정비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최대 주안점은 자국 내 독자적인 공급망 구축을 통한 요새화 전략이다. 첨단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고도화해 고품질 소비재, 첨단 장비·부품의 수입 의존도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막대한 보조금를 뿌리는 등 미래 산업에 대규모로 투자한 결과 성과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전기차·태양광·2차전지 등 3대 신주력 품목이 중국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1.4%에서 지난해 6.3%로 급증했다.
중국은 자국 중심의 국제 협력망 구축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일대일로(육해상 신실크로드)’에 참여 중인 이른바 ‘연선국(관련국)’과의 교역 확대에 공을 들이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따르면 중국과 연선국 간의 교역량은 2015년 1조400억 달러에서 2022년 2조700억 달러로 7년 만에 2배로 불어났다. 이 국가들이 중국 수출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13년 20%대에서 지난해 8월 46.6%까지 상승했다.
동남아 등 신흥 공업국에서 저부가가치 중간재를 수입하는 대신 고부가가치 소비재와 자본재를 수출해 교역 구조를 고도화하고 있는 것이다. KOTRA 베이징무역관은 최근 보고서에서 “연선국에는 신흥 경제 대국과 중앙아시아의 자원 부국들이 집중돼 있다”며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 서방국가의 대중 견제가 심화하면서 연선국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자주의 확대를 통한 새로운 세계 무역 질서 구축도 서방의 견제에 대응하기 위한 중국의 카드다. 중국은 지난해 6월 세계 최대 자유무역협정(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전면 발효된 후 중국 중심의 역내 가치사슬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2021년 9월에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도 신청한 상태다. 무역협정이라는 보호막에 기대어 서방과의 직접적인 무역 분쟁을 피하고 우군도 확보하겠다는 심산이다.
특히 중국은 미국·유럽 등 서방의 수입 장벽을 뚫기 위해 ‘홍색 공급망’ 확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멕시코 등 제3국에 제조업 공장을 설립한 뒤 고부가가치 제품을 조립·수출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우회 수출이 늘면서 중국의 ODI 가운데 아세안의 비중은 2010년 6.4%에서 2022년 11.4%로 증가했다. 멕시코에 대한 중국의 ODI도 두 배로 늘었다.
컨설팅 업체인 가베칼 드래고노믹스는 “미국의 전체 대중 수입 감소분 가운데 실제 줄어든 것은 30%에 불과하다”며 “나머지 70%는 중국이 제3국을 통해 우회 수출하거나 관세 회피를 위해 제품 가격을 실제보다 낮게 표기해 미국의 수출 규제를 무력화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김기봉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앞으로 미국이 중국의 생산 이전에 대응해 첨단 제품 규제를 더 정교화할 것”이라며 “진영 간 대립이 심화하면서 아시아·멕시코 등이 포괄적인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 기업들은 기술협력, 해외 자회사 설립 등의 방식으로 미국 본토 진출도 노리고 있다. 글로벌 1위 전해액 제조 업체인 중국 천사첨단신소재는 ‘본사→싱가포르 자회사→네덜란드 자회사→미국 자회사’로 이어지는 복잡한 지분 구조를 거쳐 미국 텍사스·루이지애나주에서 전해질을 생산할 계획이다. 또 중국은 핵심 소재와 광물 자원을 무기화해 미국의 수출 제재에 맞서기 위한 협상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8월 반도체 핵심 소재인 게르마늄·갈륨 수출 통제에 이어 12월에는 배터리 소재인 흑연 수출을 통제한 게 대표적 사례다.
앞으로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작업은 더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집권하면 중국산 제품에 대한 최혜국 대우 관세를 취소하는 등 사실상 중국과의 ‘디커플링’에 나서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지지층의 반중 정서를 의식해 중국에 대한 통상 압력을 높이고 한국·일본 등 우방국에 추가적인 대중국 봉쇄 조치 동참을 압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이에 대응해 기술 자립과 첨단산업 지원, 자립형 공급망 구축 등으로 반격 태세를 더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간 공급망 주도권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중국의 ‘기술 굴기’가 본격화하고 있어 우리도 활로를 찾기 위해 종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이 지적이다. 김 책임연구원은 “앞으로 미중 진영 간 교역이 줄어드는 등 무역 분절화 현상이 심화할 것”이라며 “비용이 더 들더라도 부품과 원자재 공급망을 다각화하는 동시에 자체 기술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아름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센터 수석연구원은 “미국·EU 등의 공급망 재편과 중국의 경제 강압 조치에 우리 기업들이 선의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취약 분야를 점검하고 다른 국가와의 공조를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히 중국과의 기술 격차 유지, 핵심 장비·소재 국산화, 자체 공급망 확보, 인력 양성 등을 통해 우리 제조업의 근본적인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 수석연구원은 “공급망 주도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초격차 기술 확보가 필요하다”며 “각국의 산업 정책을 모니터링하고 원천기술 투자와 연구개발(R&D) 세액공제, 보조금 등 기업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조은교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중국의 원자재 전략자산화, 기술 내재화 등은 우리 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우리도 중국처럼 차세대 기술 분야 생태계를 구축하는 한편 첨단산업 기술 유출 방지를 위한 핵심 인력 관리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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