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깜빡했습니다. ”
사무직 김 대리(35)가 온종일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입사했을 때만 해도 똑소리 난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 대리는 어느 순간 이름, 전화번호 등 사소한 정보부터 중요한 업무 일정까지 잊어버리는 빈도가 늘어났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없이 간단한 계산과 번역조차 원활하게 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러 회사 업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처음에는 웃어넘겼지만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스트레스가 커지자 병원 상담에 나선 김 대리. 상담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돌이켜 본 결과 하루의 대부분을 스마트폰과 PC 사용에 할애하는 탓에 ‘디지털 치매’ 증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 생활습관이 반복될 경우 뇌기능 퇴행이 가속화되며 젊은 층의 치매로 불리는 ‘영츠하이머’ 발생률이 크게 높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치매 환자 100만 명 시대에 진입하면서 사회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시대 변화와 함께 치매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다. 노인성 질환으로만 여겨졌던 치매가 어느새 김 대리와 같은 2030세대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디지털치매’ 혹은 ‘영츠하이머’라 불리는 이 증상의 원인으로는 일상의 ‘디지털화’가 꼽힌다. 스마트폰과 PC에 지나치게 의존해 단순한 정보조차 암기하지 않는 생활습관이 반복되다 보면 뇌기능의 퇴화를 가속화하고 노년의 치매를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65세 이하 치매 환자는 2009년 2만 여명에서 2020년 8만 2000여명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때마침 국내 스마트폰 보급률이 세계 1위 수준인 97%까지 높아지는 등 디지털 기기 사용이 급증한 시대의 변화를 고려할 때 젊은 치매 환자 급증과 높은 스마트폰 의존도는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치매 예방과 상담, 검진 지원 등 정부의 지원 정책 뿐 아니라 치매 발생 원인과 치료법을 밝히기 위한 연구가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발표된 한 치매 연구가 전 세계 의학계를 뜨겁게 달구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치매를 비롯한 인지장애의 원인이 되는 뇌 노폐물의 주요 배출 경로를 세계 최초로 찾아낸 것이다. 연구팀은 뇌 노폐물을 청소하는 뇌척수액의 주요 통로가 코 뒤쪽 ‘비인두 림프관망’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비인두 림프관망과 연결된 목 림프관의 이완과 수축을 통해 뇌 노폐물의 배출 작용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관련 내용이 세계 3대 학술지인 ‘네이처(Nature)’에 실렸다.
치매 정복의 실마리가 발견되면서 이를 활용한 치료법들도 다양하게 고려되는 중이다. 한의학도 치매 예방 및 치료에 대한 근거를 넓혀가고 있다. 추나요법은 치매 증상 개선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대표적인 치료법이다. 그 중 한의사가 직접 수기로 목 부위 관절을 교정하는 ‘경항부 추나요법(JS123)’은 경추의 교정과 이완을 통해 저하된 기억력을 향상시키고 치매증상을 완화시킨다고 알려졌다. 이는 경동맥의 혈류를 개선하고 체내에서 생성된 노폐물을 처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림프절을 자극해 뇌 내에 쌓인 독소와 노폐물을 효과적으로 배출하도록 돕는다.
한의학에서는 한약을 활용해 뇌 신경세포 보호와 기억력 개선에 기여하기도 한다. 육공단의 경우 국제신경학회지(INS)에 게재된 연구논문을 통해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 받았다. 육공단은 공진단에 육미지황환 처방을 더한 한약이다. 기력 회복과 면역력 증진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생한방병원과 미국 UC어바인대학교는 공동연구를 통해 육공단의 뇌기능 활성화 원리를 분석했다. 연구팀이 뇌 허혈(뇌 혈류 감소로 뇌 신경세포 기능이 저하된 상태)을 유발한 실험쥐에게 7일간 육공단을 투여한 뒤 수중 미로 찾기 실험을 통해 기억 및 학습 능력 개선 정도를 분석한 결과, 육공단을 투여한 쥐들이 목적지를 성공적으로 찾는 데 소요된 시간은 10.9초로 뇌 허혈이 유발된 쥐에 비해 2배 가량 빨랐다.
약물을 이용해 신경을 파괴한 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에서도 육공단을 투여한 쥐들이 89.7% 더 뛰어난 회복력을 보였다. 연구팀은 육공단 투여군에서 뇌세포 회복과 기억력 증진에 도움을 주는 'Egr1’ 단백질의 발현이 급증하는 것도 확인했다.
그간 지독하게 인류를 괴롭혀 온 치매 치료에 한 걸음씩 내딛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숏폼 콘텐츠 등의 신문물은 디지털 치매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치매를 유발하기도 한다. 만들어진 콘텐츠를 소비하는 수동적 활동보다는 독서, 음악, 미술, 게임 등 인지 기능을 자극할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 동호회나 봉사활동과 같이 다양한 사람과 어울릴 기회를 최대한 늘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스마트폰을 통해 ‘스마트’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생활이 되려 스마트함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자신의 일상을 돌이켜 보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