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상공부가 15일(현지 시간) 최소 5억 달러(약 6600억 원)를 투자하고 3년 내 자국에서 전기자동차를 생산하는 업체들에 관세(현 70% 또는 100%)를 15%로 대폭 낮춰주기로 했다. 글로벌 업체들의 생산시설을 유치하기 위한 파격적인 대책이다. 인도 정부는 “국내 전기차 생태계 강화”라는 이유를 댔지만 사실상 보조금이나 다름없는 지원책이다.
인도뿐만이 아니다. 반도체 업계는 보조금 전쟁이 한창이다. 미국은 2022년 제정한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인텔과 TSMC·삼성전자 등 글로벌 기업에 총 527억 달러를 제공한다. 반도체 이니셔티브(주도권)를 되찾으려는 일본도 보조금을 퍼붓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의 TSMC 1공장 건설 비용 1조 엔(약 8조 9400억 원)의 절반에 가까운 4760억 엔을 보조금으로 지원했다. 통상 5년 정도 걸리는 공장 건설 기간도 2년으로 짧아졌다. 중국은 최소 27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산업 육성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고 차세대 반도체 시장점유율을 지금의 10%에서 20%로 올리려는 유럽연합(EU)은 공장 건설 비용의 약 40%를 주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 같은 글로벌 흐름에서 동떨어져 있다. 올해 만료되는 반도체 투자세액공제 연장과 국가산업단지 조성, 인력 양성 등이 전부다. 보조금은 인건비와 각종 비용을 상쇄해준다. 미국처럼 임금과 생산비가 높은 나라에서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조금이 필수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삼성전자에 60억 달러의 보조금을 주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국에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고 기술 패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주요국이 국제 절차를 무시하고 보조금 지급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관련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이는 보조금 지급에 대한 국내 반대 여론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은 무역으로 먹고사는데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역행한다는 얘기다. WTO는 특정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해 피해를 입은 나라가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거나 제소할 수 있게 돼 있다. 대기업에 나랏돈을 주는 것은 맞지 않다는 주장도 거세다. 대기업을 강자로 보고 강자는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언더도그마(underdogma)’다.
전문가들의 판단은 다르다. 주제네바 대사를 지낸 최석영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17일 “주요 국가가 너 나 할 것 없이 국가 안보를 앞세워 보조금 지급에 나서고 있고 WTO 분쟁 체제는 작동하지 않은 지 오래”라며 “이런데도 자유무역을 얘기하면서 보조금 지급을 외면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보조금과 불공정 무역을 다루는 WTO의 위상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WTO 분쟁 회부 건수는 △2018년 38건 △2019년 20건 △2020년 5건 △2021년 9건 △2022년 6건 △2023년 6건 △2024년 1건 등으로 급감하고 있다. 국제 무역 분쟁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는 대법원 격인 WTO 상소 기구가 2019년 12월 미국의 상소위원 선임 보이콧으로 기능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상소 기능 정지로 분쟁이 무기한 미결 상태로 계류되는 경우만 2023년 6월 기준 총 31건에 달한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 세액공제를 해줄 때 공장 전체에 들어간 비용에 해주지만 우리는 기계 등 특정 장비에만 해주고 있어 그 지원 금액만 조 단위로 차이가 난다”며 “일각에서는 왜 대기업에 보조금을 주느냐는 얘기를 하는데 글로벌 흐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삼성전자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우려되는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의 지원사격 없이 글로벌 시장에서 홀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대만만 해도 정부가 TSMC를 군사·경제 안보의 최우선 도구로 여기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의 통상·산업 정책을 경제 안보의 관점에서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통상교섭본부가 준비 중인 신(新)통상 정책도 보조금 지급을 포함해 접근 방식을 새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EU만 해도 반도체에는 보조금 지급을 예외로 하기로 한 상태다. 통상교섭본부장 출신인 박태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미국의 대중 압박과 중국의 대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대러 제재 등이 중요할 것”이라며 “경제 안보와 직결된 지정학적, 기술정치학적(techno-politics) 불확실성이 올해 주요 통상 리스크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올 11월 대선에 도전장을 내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글로벌 통상과 무역 환경이 지금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하면 시행령 개정을 통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을 무력화할 수 있으며 이 경우 국내 기업들의 중장기 투자 계획은 완전히 꼬이게 된다”며 “트럼프는 어떻게 튈지 모르며 방위비 분담금 인상과 대만 방위를 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올 수도 있어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