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큰 손 기관투자가들이 부실화된 한국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채권에 투자하기 위한 대규모 펀드 조성에 착수했다. 최근 공매로 넘어가는 개발 사업들이 우후죽순 쏟아지자 이 시장에서 기회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올 연말까지 PF 부실채권(NPL)의 큰 장이 열릴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7일 투자은행(IB) 따르면 한국투자증권은 최근 TPG안젤로고든과 함께 ‘스페셜시츄에이션 SMA(Separately Managed Account)’ 펀드를 최소 4000억 원 규모로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 펀드는 한국 부동산 시장에서 나오는 대출에 투자하는 콘셉트로 목표 수익률을 9%로 잡았다.
양사 펀드는 PF 실행 후 미착공 사업장에서 대출채권을 할인 매입하거나 각 도시 핵심지역의 브릿지론 사업장에서 중·후순위 채권을 매입, 지분(Equity)으로 전환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쓴다. 대부분 자금은 TPG안젤로고든이 보유한 글로벌 펀드에서 조달한다. 한국투자증권은 이번주부터 딜(Deal) 접수를 시작해 상반기 중 투자를 본격화한다는 계획이다. TPG안젤로고든 관계자는 “펀드 운용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금 규모를 더 키워갈 수 있다”며 “한국의 다른 증권사들과 추가 펀드 조성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투자청(GIC) 역시 한국 부실 PF 투자 펀드를 대규모로 운용하는 해외 큰손 가운데 하나다. 헤리티지자산운용과 3500억 원 이상 약정해 둔 부동산 부실채권 전용 펀드를 지난해부터 본격 운용하기 시작했다.
이 밖에 페블스톤자산운용 등 다른 국내 금융회사들과도 비슷한 전략을 활용하는 수천억 원대 펀드를 만들어 투자에 나서왔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GIC가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한국 부동산 채권 시장에 투자하기로 약정해둔 금액만 1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캐나다계 대체투자 운용사 브룩필드는 2021년 한국에 신설한 ’브룩필드프로퍼티스 로지스틱스’를 통해 최근 부실화된 국내 물류센터개발사업 확보에 나섰다. 팬데믹 시기 중소 시행사들이 잇따라 추진한 물류센터 개발이 착공도 못한채 멈춰선 사례가 많고 최근엔 이들 사업권의 가치가 폭락하자 투자 기회를 찾고 있는 것이다. 실제 자금줄이 말라버린 시행사 중 상당수가 채권단들의 기한이익상실(EOD) 통보에 개발 사업 지분을 넘겨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있다.
해외 대형 기관들이 한국의 부동산 부실채권 투자 채비를 갖추는 데는 정부가 PF 연착륙을 준비하고 있는 배경이 한 몫한다. 임광규 한국은행 금융안정국 팀장은 지난달 말 금융안정회의 기자간담회를 통해 “부동산PF의 질서 있는 정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상 사업장에 대한 유동성 지원을 지속하는 가운데 부실 우려 사업장에 대해서는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업권별 PF 대출 증가세가 둔화되는 가운데 총선이 끝나면 NPL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현재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1조 원 규모 PF 정상화 펀드를 운용 중인 가운데 국내 대형 증권사들도 올 들어 비슷한 펀드 조성에 속속 나서고 있다.
NH투자증권이 업계 최초로 올초 설정한 2000억 원 규모 기관 전용 부동산 사모펀드를 필두로 메리츠증권도 메리츠화재, 메리츠캐피탈과 3000억 원 규모 펀드를 공동 조성했다. 하나증권도 최근 800억 원 규모 펀드 약정을 끝낸 상태다. 증권사 관계자는 “미리 펀드 조성을 해 두면 각각의 프로젝트마다 계열사 심사를 거치는 것 보다 더 빠르게 자금 집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과거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 집권 이후 촉발된 미·중 갈등이 해외 큰손의 시선을 한국으로 일부 돌려놨다는 분석도 나온다. 글로벌 운용사의 아시아 부동산 펀드들이 투자 대상에서 중국을 서서히 제외시킨 게 한국 및 일본 시장으로 투자처를 옮기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2022년 본격화된 금리 인상에 중국 부동산이 얼어붙자 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이런 현상은 더 가속화되는 추세다.
한국 역시 부동산 시장이 급랭한 건 마찬가지지만 금리가 점차 인하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면서 PF 부실채권 투자가 더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부동산 IB업계의 한 관계자는 “금리가 내려가면 개발의 사업성이 살아날 수 있는데 이미 신용도가 급락한 중소 시행사들은 사업을 이끌어갈 여력을 상실한 상태”라며 “이런 자산을 싼 값에 사들일 수 있다는 점이 NPL 투자 매력”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