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한 크기의 물 분자가 멈추는 순간이 포착됐다.
유니스트(UNIST·울산과학기술원) 물리학과 박형렬 교수팀은 강원대학교 정지윤 교수팀, UNIST 김대식, 박노정, 정준우 교수팀, 충북대학교 김경완 교수팀, 서울대학교 박윤 교수팀과 함께 테라헤르츠파를 이용해 나노 공진기 내부 이차원 세계에 갇힌 물 분자의 동역학이 억제되는 것을 세계 최초로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나노 공진기에서 증폭된 고밀도의 빛으로 물 분자에서 초고속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군집 운동을 피코초(1조분의 1초)라는 찰나의 순간에 관찰한 것이다.
물의 동역학은 물 분자가 특정 주파수에서 특정 운동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동역학이 억제되면 물 분자는 잠깐 고체와 같은 성질을 갖게 된다. 나노미터(nm, 10억분의 1미터) 두께의 물 분자는 테라헤르츠 전자기파의 파장보다 백만분의 일 정도로 작아 물 분자의 변화를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 1저자 양효심 UNIST 연구원은 “기존 물 분자의 특성은 매우 낮은 주파수에서 전기적으로 측정했다”며 “하지만, 테라헤르츠 영역과 같은 높은 주파수에서 매우 좁은 틈에 갇힌 물 분자들의 동역학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연구팀은 테라헤르츠파의 집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원자층 리소그래피 기술(반도체 공정에서 주로 사용되는 포토리소그래피 공정과 원자층 증착법을 활용해 테라헤르츠 나노공진기 구조물을 대면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이용해 나노 공진기를 제작했다. 기존의 나노 공진기는 수십 나노미터 수준까지만 너비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원자층 리소그래피를 이용한 나노 공진기는 1나노미터까지 틈의 너비를 줄일 수 있다.
제작된 공진기는 축전기의 원리에 따라 틈의 너비가 나노미터 영역으로 좁아질수록 내부에 유도되는 전기장의 변화에 특성이 민감하게 바뀐다. 즉, 분자 운동의 측정 감도가 크게 향상된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나노미터 틈에 갇힌 물은 양쪽 면에 의해 물 분자가 정렬돼 그 움직임이 억제되는 ‘계면효과’가 발생한다. 물 분자는 테라헤르츠 주파수 영역에서 피코초 속도로 움직이는 다양한 군집 운동을 하는데, 나노 틈에 갇힌 물 분자는 이러한 군집 운동이 억제될 것이라 예상했다.
연구팀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2~20나노미터까지 너비를 조정할 수 있는 나노 공진기를 제작하고 틈속에 물을 채웠다. 테라헤르츠 전자기파 투과실험(테라헤르츠 영역의 전자기파 펄스를 발생시킨 후 시료를 통과하게 만들어 펄스 신호를 전기 광학 샘플링 방법으로 검출해 시료의 테라헤르츠 투과율을 측정하는 실험)을 통해 나노미터 두께의 물의 복소 굴절율을 확인했다. 실험 대상에 빛이 진행할 때, 빛의 크기가 줄어드는 비율로 물의 동역학 변화를 확인했다.
연구팀은 약 2나노미터 너비의 틈에서 계면효과에 의해 물의 피코초 동역학이 억제되는 것을 최초로 확인했다. 또한 10나노미터의 틈에서 물 분자의 피코초 군집 운동이 감소해 동역학이 억제되는 것 또한 발견했다.
공동 1저자 지강선 UNIST 연구원은 “기존 나노미터 틈에 구속된 물은 계면효과에 의해 정렬돼 고체와 비슷한 현상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번 실험를 통해 계면 효과뿐만 아니라 물 분자들의 피코초 군집 운동 감소에 의한 영향도 존재한다는 것을 최초로 밝혔다”고 설명했다.
박형렬 교수는 “이번 연구는 이차원 물 분자의 초이온 상태(superionic phase) 등을 관찰하거나 DNA, RNA와 같은 용매에 있는 분자들의 동역학을 연구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며 “나노 공진기의 크기를 조절해 중적외선, 가시광 영역까지 확장할 수 있는 연구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는 세계적 권위의 국제 학술지인 사이언스 어드밴스(Science Advances)에 4월 24일 온라인 게재됐다. 연구 수행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연구재단(NRF),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울산과학기술원, 강원테크노파크(GWTP)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