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A영역에서는 31번째 이랑 9.4미터 지점의 배추가 표본구역의 기점이 되는 겁니다”
25일 수확을 앞둔 봄배추가 가득 들어차있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윤중협(72세)씨의 비닐하우스 앞, 정동윤 통계청 홍성사무소장이 몇 차례 계산기를 두드린 끝에 2024년 봄배추 생산량 조사 현장을 찾은 이형일 통계청장에게 이같이 보고했다. 정 소장은 표본을 ‘임의 추출’ 한다고 해서 아무 배추나 뽑아선 곤란하다며 몇 번째 이랑의 몇 번째 배추를 뽑을지 모두 컴퓨터가 추출한 무작위 난수를 바탕으로 정해진다고 강조했다. 과학적인 표본화를 바탕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표본 필지당 12통씩만 뽑아도 전체 수확량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청장이 직접 배추를 수확한 충남 예산군 일대는 우리나라 봄배추의 40% 가까이를 재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소장은 배추 뽑기에 앞서 표본 선정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우선 작업 대상이 되는 필지는 통계청에서 선정한다. 통계청은 생산량 조사 대상 16개 작물과 물가민감작물 3종에 대해 전국 1만 개 필지를 생산량 조사의 모수로 관리하고 있다. 모수는 생산·소비 현황을 고려해 5년에 한번 업데이트 한다. 통계청이 1만개의 필지 중 생산량의 지역 편중 등을 고려해 작업 지역을 정하면 공은 통계청 지역 사무소로 넘어온다.
지역 사무소에서는 도급 조사원 2명과 현장 경험이 많은 공무원을 작업 지역으로 선정된 표본 필지로 파견한다. 통계청 홍성사무소 관계자들은 “정작 표본으로 선정됐는데 농가에서 협조해주지 않을 때가 가장 난감하다”며 “임의로 다른 필지를 조사할 수 없기 때문에 지역 농가와 평소에 신뢰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귀띔했다. 표본 조사를 위해 수확한 작물을 함부로 처분하지 않고 다시 돌려주는 것을 원칙으로 정한 것도 농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다.
표본 필지는 A·B 두 영역으로 나눠 조사를 진행한다. 한 영역당 3㎡를 조사하는 것이 기본이다. 표본 선정 과정에서는 철저하게 현장 직원의 주관적 개입을 배제한다. 난수를 활용해 표본 기점을 정하는 방식이다. 정 소장은 “오늘 작업하는 필지에는 비닐하우스가 12동, 총 120이랑”이라며 “여기에 중앙에서 하달된 난수(0.26)를 곱하면 31.2입니다. 31번째 이랑이 작업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31번째 이랑의 길이는 94미터입니다. 여기에 두번째 난수(0.10)를 대입한 9.4미터 지점이 표본 기점”이라고 말했다. 현장 조사에 함께한 통계청 직원은 “작위적으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도록 모든 과정이 과학적으로 규정돼있다”며 “통계청은 숫자에 진심”이라고 강조했다.
기점이 정해지면 3㎡ 영역을 정해야 한다. 먼저 기점을 중심으로 10개 이랑의 평균 폭을 구한다. 평균 폭이 나오면 3㎡가 되는 세로 폭이 자동으로 구해진다. 이렇게 3㎡ 영역이 정해지면 먼저 배추 포기 수를 기록한다. 정 소장에 따르면 통상 3㎡에서는 10~15통의 배추가 생산된다. 이 중에서 표본이 될 6통을 고르는 작업도 통계청에서 내려보낸 난수를 바탕으로 정해진다. B구역에서도 같은 작업을 반복해 총 12통을 뽑는다.
정 소장의 안내에 따라 비닐하우스 속 정해진 기점으로 이동한 이 청장은 올해의 표본으로 선정된 배추를 수확했다. 고무장화와 팔토시로 무장한 이 청장은 한아름 가득 속이 꽉 찬 봄배추의 밑동을 익숙하게 슥슥 잘라 노란 바구니에 옮겨담았다. 12통의 배추는 먹을 수 없는 바깥쪽 잎을 제거한 뒤 저울에 올라간다. 조사원들은 표본 배추의 무게를 다시10a(아르)당 생산량(무게)으로 환산해 조사표에 기록한다. 각 표본 필지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측정된 결과값에 고해상도 위성으로 조사한 재배 면적을 곱하면 비로소 전국 생산량이 산출된다.
산출된 수확량 통계는 각 기관에 배포된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수확량 통계를 바탕으로 수매·비축, 시장격리, 소비촉진 등 수급관리 대책을 마련한다. 농경연에서는 수확량 통계를 바탕으로 월보를 작성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학술 연구의 자료로 사용한다. 농업과는 관계 없어 보이는 한국은행도 통계청의 생산량 조사를 받아간다. 농림어업 국내총생산(GDP)을 추계하기 위해 수확기와 동시에 진행되는 생산량 조사 통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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