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5일 확대 시행 100일을 맞는 중대재해법이 영세 중소기업을 곤경에 빠뜨리는 이유 중 하나로 모호한 가이드라인이 꼽힌다. 문서에 나와있는 법 조항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교육이 진행되거나 실효성이 떨어지는 지침을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대재해법이 금형·프레스 등 뿌리산업부터 정보통신(IT) 같은 벤처·스타트업 분야까지 다양한 중소기업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시간이 갈수록 현장의 혼란이 가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올 초 중대재해법이 5인 이상 50인 미만 중소기업으로 확대 시행됐지만 이를 현장에 적용할 구체적인 매뉴얼이 없어 혼란을 겪고 있는 사업장이 대다수다. 부산 녹산산업단지에서 50인 미만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정부에서 준 매뉴얼을 살펴보면 ‘몇조 몇항에 나온대로 안전 교육을 실시해라’ 수준으로 두루뭉술하게 표기돼 있다”며 “안전 관리 담당자가 없으면 사업체에 맞는 가이드 라인을 만들기 힘들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전 판례를 찾아보고 처벌 수위를 확인하라는 식으로 교육을 진행해 일반인이 파악하기 어렵다”며 “차라리 세세한 가이드라인이 있으면 지키면 되는데 없어서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마찬가지로 경북 구미에 위치한 국미국가산업단지에서 50인 미만 기업을 이끌고 있는 B씨는 “직원들의 안전 인식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재해가 발생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고를 수습해야 하는지 교육하기 쉽지 않다”며 “중소기업에서는 대표가 모든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에 역할이 막중한데 중대재해법을 지키기 위한 정확한 지침이 없어 두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구체적인 규정도 중대재해 예방은 물론 산업 현장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의견도 있다. 사고 및 재해 발생 시 근로자들이 맡고 있는 역할을 인지하고 있는 지에 따라 중대재해법 적용 여부가 갈린다. A씨는 “사업장에서 비상 사태가 일어난 후 상황이 종료되면 근로자를 데려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담당하고 있는지 확인한다”며 “근로자의 답이 서류상 역할과 다르면 대표가 중대재해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중소기업 특성상 한 근로자가 여러가지 일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근로자도 많아 이를 정확히 인지하기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대다수의 중소기업이 인력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안전 관리 담당자를 연속성 있게 고용하기도 어려운 실상이다. 경북 구미에 위치한 한 중소기업은 얼마전 안전 관리 담당자가 정년 퇴직을 하면서 다른 직원이 업무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인수인계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신규 담당자가 관련 교육을 받지 못해 안전 관리에 대한 공백이 생겼다. 이마저도 안전 관리 담당자를 채용할 여력이 없는 기업은 경영 관리 담당 직원들이 돌아가며 교육을 이수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양한 산업 특성에 맞는 중대재해법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북 구미에 있는 한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C씨는 “뿌리산업만 살펴봐도 프레스, 금형 등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산업별로 지침을 구분해 제시해 주면 좋을 거 같다”며 “영세한 기업에서 매뉴얼을 자체적으로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