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을 많이 냈다는 이유로 횡재세를 때리면 반대로 적자 날 땐 보전해 줄 건가요?"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올해 1분기 호실적에도 한숨을 내쉬며 이같이 토로했다. 지난해 정치권을 달궜던 횡재세 논란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횡재세는 외부 요인으로 일정 수준 이상 이익을 얻는 기업들을 상대로 초과 수익 일부를 국가가 환수하기 위해 부여하는 세금이다. 올해 1분기 유가상승으로 이익이 늘어난 정유업계가 정치권의 표적이 된 이유다.
유가상승에 정제마진 껑충...정유 4사 호실적 기록
5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정유업계는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 고조에 따른 국제유가 상승과 정제마진 개선 등으로 올해 1분기 호실적을 기록했다. 정유사의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은 1분기 평균 12.5달러로, 통상 손익분기점인 5달러의 2.5배 이상 높았다.
SK이노베이션(096770)은 1분기 석유사업 부문에서 영업이익 5911억 원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했다. 에쓰오일은 1분기 4541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전년 동기보다 11.9% 감소했지만, 564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한 직전 분기와 비교하면 흑자로 돌아섰다. HD현대(267250)오일뱅크은 1분기 3052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전년 동기 대비 17.8% 증가한 수치다. GS(078930)칼텍스도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 상승이 예상된다.
지난해 말 '적자 쇼크'를 맞은 정유사들이 영업손실을 털고 일제히 상승세로 접어든 것이다. 지난해 4분기에는 정유업계의 합산 영업적자만 1조 원이 넘었다.
숨통 트이자마자 고개든 ‘횡재세’…"초과이익 공유"
숨통이 트일만하자 정치권에서는 바로 횡재세 논의가 고개를 들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2일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고유가 시대에 국민부담을 낮출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민주당은 지난해 유동적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횡재세 도입을 추진한 바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국민께서는 유가가 오를 때는 과도하게 오르지만 내릴 때는 찔끔 내린다는 불신과 불만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막연하게 희망 주문만 낼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조치로 국민 부담을 덜어야 한다"며 횡재세 도입을 제안했다.
고유가·고금리 등으로 호실적을 낸 기업으로부터 부담금을 걷어 사회적 고통을 함께 분담하자는 것이 그럴싸한 논리로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정유업계의 실적 개선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얻은 불로소득 취급을 하며 고유가의 원인과 책임을 사기업에 전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추사 아닌 정유사...영업이익률 2%도 안돼
우선 국내 정유사들은 해외에서 원유를 직접 뽑아내는 시추사와 수익구조가 달라 횡재세 부과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원유를 생산하는 시추사는 국제유가에 따라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정유사는 다르다. 해외서 비싼 원유를 수입한 뒤 이를 정제해 휘발유 등 석유제품으로 팔기 때문에 국제유가가 오르면 원가 부담이 커진다. 또 고유가로 인해 소비가 감소하면 제품 가격이 오르지 않아 손해를 보게된다.
실제 국내 정유사는 고유가가 시작된 2007년 이후로 놓고 봐도 연평균 영업이익률이 1.8%에 그친다. 그야말로 박리다매 저마진 구조다. 같은 기간 국내 제조업 평균 영업이익률은 6.5%였다.
외부환경 변화에 따라 변동성이 매우 큰 산업이라는 점도 횡재세를 부과하기 무리라는 판단이다. 지난해 4분기 일제히 적자를 냈던 것처럼 한 분기, 한 분기 실적이 외부환경에 따라 널뛰기 때문이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해외 시추사와 국내 정유사의 수익구조는 완전히 딴판”이라며 “적자를 낼 때는 모르쇠 하면서 흑자 때마다 횡재세를 들고 나오는 것이 적절한 방식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중과세 문제도…"투자 위축되면 경쟁력 급감"
또 이미 법인세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중과세의 위헌 소지도 있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징벌적 과세는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켜 결국에는 산업의 경쟁력을 악화시킬 수 있다. 정유업계는 최근 액침냉각, 지속가능 항공유(SAF) 등 미래 먹거리 발굴에 한창이다. 전 세계적으로 탄소중립 규제가 강화됨에 따라 기존 석유상품만으로는 사업을 지속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신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 없이는 수 년 안에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며 "당장의 수익이 문제가 아니라 미래가 달린 문제"라고 꼬집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