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대학들이 재수강 가능 횟수를 늘리는 등 관련 제도를 학생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손질하고 있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 취업·진학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만큼 학생들은 이같은 변화를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다. 다만 코로나19 이후 학점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재수강 제도까지 완화되면 학점의 공신력이 낮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2일 대학가에 따르면 연세대는 올해 2학기부터 재수강 가능 횟수를 기존 4회에서 6회로 확대한다. 재수강권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08~12학번의 평균 재수강 횟수가 5.2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수강 제한에 따른 학점 불이익이 대폭 줄어든 셈이다.
연세대가 재수강 횟수 제한을 처음으로 도입한 건 지난 2012년 9월이다. 당시 재수강 제도를 사실상 폐지하려고 하다가 학생들의 반발에 부딪쳐 졸업 시까지 총 3회로 제한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이후 10년 가까이 제도를 유지해 오다가 지난 2020학년도 2학기 1회를 추가했으나 이는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한 ‘긴급 조치’에 가까웠다.
고려대 총학생회도 이달 초 학생들을 대상으로 재수강 가능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총학생회 측은 지난해 선거 당시부터 재수강 가능 학점을 기존 C+에서 B0로 상향조정하는 방안을 적극 내세운 바 있다. 총학은 답변 결과를 바탕으로 대학 측과 협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최근 3년 내 부산대, 숭실대, 중앙대 등이 재수강 시 획득할 수 있는 학점의 상한을 상향하는 등 대학가에 재수강 제도 완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서울대에선 지난해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던 선거운동본부가 ‘학점포기제’를 공약으로 내걸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C+ 이하의 성적을 받은 강의 중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 재수강이 가능한 강의가 개설되지 않거나 아예 폐지돼 대체 과목이 없으면 재학 연한 내 최대 6학점을 포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다만 투표율 미달로 인해 해당 선본은 당선에 실패했다.
지난 2010년대 초중반만 해도 대학가에선 상대평가를 대거 도입하고 재수강 요건을 엄격하게 하는 등 ‘학점 다이어트’가 성행했다. 교육부가 지난 2014년 진행했던 대학구조개혁 평가에서 ‘성적 분포의 적절성’ 지표를 포함시키며 학점 인플레이션 문제를 정조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업·진학 경쟁이 갈수록 심화되는 와중에 코로나19를 거치며 절대평가 도입이 확산되면서 학점이 상향평준화되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 연·고대, 한양대 등 서울 시내 주요 대학들이 무더기로 학점의 백분위 환산점수(GPA) 환산식을 개정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GPA는 각 대학별로 학점의 만점 기준이 4.3, 4.5점 등으로 다를 때 학교 간 비교를 가능하게 만드는 점수로 특히 로스쿨 입시에서 중요 요소로 꼽힌다. 문제는 각 대학별로 환산식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똑같이 4.3 만점인 학교들 사이에서도 동일한 학점을 받았을 때 환산점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재수강이 쉬워진다는 소식에 학생들은 반기는 분위기다. 연세대 재학 중인 조모(24)씨는 “(현행 재수강 4회 제한 하에선) 불가피한 사정으로 학업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경우 받는 불이익이 상당히 크다”며 “타 학교와의 형평성도 맞지 않았던 만큼 이번 제도 개선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라고 말했다. 같은 대학의 기계공학과 4학년 학부생도 “재수강 4회는 너무 적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코로나19 이후 학점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점에서 변별력을 해친다는 비판도 있다. 국내 대학의 A학점 이상 비율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 1학기 34.6%에서 2021년 1학기 48.6%로 급등했다. 2022년 2학기 기준 이화여대의 A학점 비중은 60.8%에 달하며 서울대(59.3%), 고려대(59.0%), 연세대(57.3%)도 절반을 넘는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재수강 제도 남용은 ‘학점 세탁’으로 이어져 결국 학점의 공신력을 훼손하게 된다”며 “재수강한 강의의 경우 초수강 학점을 의무적으로 기재하도록 하는 등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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