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로는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작가의 좋은 사례다. 홍익대 회화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전문사 과정을 졸업한 후 잠재력 있는 신진작가를 발굴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2014)에 선발됐다. 이듬해 미술관이 운영하는 고양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뽑혔고 미술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작가는 모방·차용 등을 뜻하는 전유(專有) 기법을 통해 만화 같은 대중문화부터 미술사까지 작업으로 끌어들인 ‘유사 회화’를 펼쳐 보이는데, 2018년 제12회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해 지난해 아르코미술관 기획전까지 다양한 기관의 초청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2년 평균 한 번 꼴로 개인전도 열었다. 다만 전속 화랑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는데, 올해 초 갤러리 띠오의 김현민 대표가 전속을 제안했다. 띠오는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두 디렉터가 합심해 2020년 개관한 신생 갤러리다. 김 대표는 “수년 전부터 관심 갖고 지켜본 유망작가였다”면서 “한창 커가는 젊은 작가와 신생 갤러리의 공통적 고민이 있었고 협력을 통한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전속작가제 지원 사업’을 두드렸다. 작품 제작비용, 작가 프로모션 등에 사용할 수 있는 지원금을 받았다. 작가는 안정적인 창작활동이, 갤러리는 전속작가와 소통하며 효율적인 홍보를 펼치는 일이 가능했다. 띠오는 오는 9월 4일 개막하는 키아프(kiaf) 서울에도 윤 작가와 함께 참가할 계획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미술가를 키워내는 데도 똑같이 적용된다. ‘거장’이나 ‘블루칩’ 예술가를 탄생시키기까지 교육과 창작 여건 뿐만 아니라 미술관·비엔날레 등 기관의 검증이 요구되며, 평론가·연구자들의 심도있는 분석과 지속적인 전시를 통한 사회적 공감 확보도 필요하다. 출판·아카이브 같은 배경이 있어야 작품 거래·관람 등의 유통시스템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이를 통해 ‘미술계 생태계’가 유기적인 선순환 구조를 이룰 수 있다. 유럽의 경우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400년 이상의 역사 속에 미술시장이 형성됐고, 미국은 기업의 적극적인 메세나 활동과 개인 컬렉션을 통한 미술관과 작가 후원이 ‘문화 선진국’을 이끌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급격한 근대화·산업화로 인해 미술시장 형성의 역사가 짧다. 시장 규모가 1조 원을 넘어섰고, 경매나 아트페어에서 수 억 원 대 작품 거래 소식이 들려 오지만 이를 통해 실익을 얻는 예술가나 종사자는 전체의 0.1%에 불과하다. 쏠림 현상이 심하고 유통구조가 불안정하다. 문화예술 소비자인 미술 향유층 확산과 생산자인 유망작가 발굴과 육성이 동시에 주어진 숙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류의 영향으로 K아트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높아져 해외 진출의 적기를 마주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조직이 팔 걷어 부치고 지원 정책을 내놓는 이유다. 현대미술의 패권을 뉴욕에 뺏긴 영국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데미안 허스트를 위시해 등장한 yBa(젊은 영국 미술가들)가 주목받을 때 전 세계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을 총동원해 확산을 도왔다. 2000년대 중국 현대미술의 약진에도 정부의 전략적 지원이라는 뒷배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정책지원은 선순환 생태계 조성을 위한 인프라 제공에 집중해 왔다. 이는 재능있는 예술가들이 뛸 수 있는 고속도로를 닦는 일과 비슷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고양·창동 레지던시가 창작공간을 제공한다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국제예술네트워크 사업은 해외 레지던시 입주를 지원해 작가 도약의 기회를 제공한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작가를 키워낼 전속 갤러리를 지원하고, 미술품 대여사업과 아트페어 등의 플랫폼을 육성하는 일은 작가를 태우고 달릴 자동차 개발에 빗댈 수 있다.
기반을 다진 이후에는 일괄적 지원을 넘어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전속작가제’ 지원 대상 중 국내외 전문가들의 심사로 소수의 작가를 선정하는 ‘우수 전속작가제’는 기획전시 개최를 통해 집중 홍보를 모색한다. 올해는 윤향로를 비롯해 기슬기·람한·신교명·오제성·이병호·한석현이 우수 전속작가로 선정됐고, 키아프와 프리즈서울 개최를 앞두고 해외 미술계 관계자들이 대거 방한하는 시기에 맞춘 8월 16일 전시가 개막한다. 개최 공간은 종로구 한옥 휘겸재로 택했고, 이대형 예술감독이 기획을 맡았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도 참가했던 정은영·남화연, 에르메스재단 미술상과 송은미술대상 등을 수상한 전소정 같은 중진작가는 ‘한국작가 해외진출 집중 프로모션’을 통해 국제적 도약의 기회를 모색한다. 이미 검증됐고, 해외 전시의 경험도 있는 작가들이다. 해외 미술계 인사들이 직접 작가 작업실에 방문해 소통하고, 영문 비평문 출간을 위해 ‘필진 매칭’ 등의 지원사업이 진행된다.
김수현 문체부 시각예술디자인과장은 “한국 미술이 약진하는 상황에서 미술관·아트페어에서의 단편적 전시지원이 아니라 한국미술에 대한 담론 형성으로 수요를 키워갈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다”면서 “한국미술의 해외 연구 사례가 적기에 현지 지원을 통해 이를 보완하는 한편 미술 생태계 전반이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한국미술의 가치를 높여갈 수 있도록 신규사업을 적극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올가을에는 ‘미술주간’을 확대해 문체부와 서울·부산·광주시가 손잡고 비엔날레, 아트페어, 전시를 전국 통합적으로 홍보하는 ‘대한민국 미술축제’가 처음 열릴 예정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