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은행에 상속 절차를 맡기는 ‘유언 대용 신탁’ 규모가 1년 만에 1조 원가량 늘었다. 생전에는 은행에 재산을 맡겨 운용하고 사망 이후에는 분쟁 없는 증여·상속을 원하는 중장년층 중심으로 상속 신탁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 1분기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의 유언 대용 신탁 잔액은 3조 3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1분기(2조 3098억 원)에 비해 43% 불어난 수치다. 2020년 말 8791억 원에 불과하던 수탁 규모가 3조 원을 넘어섰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은행들이 고객의 수요를 찾아 발 빠르게 서비스를 확대한 덕분이다. 유언 대용 신탁은 고객이 금융사에 현금·부동산 등 재산을 맡긴 뒤 생전에 지정한 배우자·자녀 등 사후 수익자에게 이전하는 금융 상품이다. 사후에 자산이 한꺼번에 넘어가는 유언과는 달리 유언 대용 신탁을 활용하면 일시·분할 지급 등 상속자가 자산을 상속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아파트는 첫째 아들에게 35세가 되면 지급하라” 등을 생전에 미리 지정해놓는 방식이며 신탁을 받은 금융회사가 이를 실행한다.
상속을 둘러싼 분쟁이 늘고 있는 점도 유언 대용 신탁 수요가 커지는 배경이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상속재산의 분할에 관한 처분 접수 건수는 2022년 2776건으로 2014년(771건)부터 매년 증가했다. 유언 대용 신탁은 사망 이후에 미리 정한 방식대로 상속하기 때문에 분쟁을 줄일 수 있다.
유언 대용 신탁 시장의 성장은 비이자 부문 강화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유언 대용 신탁은 수수료 비즈니스인 데다 다른 신탁 상품과의 연계를 기대할 수 있어서다. 올 1분기 4대 은행의 신탁 수수료 이익은 1775억 원으로 지난해 1분기 1897억 원과 비교해 6%가량 줄었다.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대규모 손실 사태가 불거진 후 올 1월 ELS 판매를 전면 중단했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비이자 수익 확보가 절실한 현 상황에서 유언 대용 신탁 시장이 ELS를 대신할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며 “다양한 서비스와 연계해 수수료 수익을 늘릴 수 있는 방안을 준비해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은행들은 기존 신탁 외에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유언장 집행, 유산 정리, 가업 승계 신탁 등으로 영업을 확대하기 위해서다. 신한은행은 유언 대용 신탁 전산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신탁 라운지를 통해 부동산 및 금전 증여 신탁, 기부 신탁 등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나은행도 지난달 노후 자산 관리부터 유언장 보관, 상속 집행까지 대행해주는 ‘유산 정리 서비스’를 출시했다. ‘하나 뉴시니어 라운지’를 운영하며 생전의 자산관리부터 유산 정리까지 자산 관리 원스톱 서비스를 지원한다. 금융권 관계자는 “고령인구 증가로 전체 자산에서 고령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며 시니어 고객 확보가 중요해졌다”며 “시니어 맞춤형 서비스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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