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이후 대만에서 매년 열리는 정보기술(IT) 전시회인 컴퓨텍스는 명목상 미국 CES, 독일 가전전시회(IFA) 등에 이어 세계 5대 전시회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한동안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대만 난야 등 토종 반도체 업체들이 사실상 몰락하면서 전자 업계에서 대만의 위상이 낮아지자 시장의 관심도 함께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일(현지 시간) 대만 현지에서 지켜본 현지 전자 업계의 열기는 그야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IT 업계의 제왕으로 떠오른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 지난달 29일 황 CEO와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 차이밍제 미디어텍 회장 등 대만 반도체를 주름잡고 있는 ‘반도체 슈퍼스타’들이 타이베이의 닝샤 야시장에 등장하자 아이돌 그룹 못지않은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그들은 현장에서 시민들과 사진을 찍는 등 허물없이 어울리면서 현재 반도체, 더 나아가 인공지능(AI)의 중심지가 대만이 됐음을 보여줬다.
이 같은 자신감은 컴퓨텍스 2024 기조연설에서도 이어졌다. 황 CEO는 “AI 칩 주도권은 여전히 엔비디아가 쥐고 있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강조했다.
엔비디아는 2022년 챗GPT 등 생성형 AI 서비스가 화두가 된 후 세계 반도체 트렌드를 주름잡는 회사로 우뚝 섰다. 엔비디아의 주력 제품인 그래픽처리장치(GPU)가 AI 연산에 적합한 반도체 칩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MS)·구글 등 ‘빅테크’들이 AI 사업 진출을 위해 이 회사의 GPU를 대량 구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는 GPU 호조로 1분기에 169억 900만 달러(약 23조 원)의 영업이익을 거두며 지난해 동기보다 690%나 급등한 실적을 기록했다.
황 CEO가 이번 기조연설에서 가장 강조한 내용 역시 GPU다. 그는 엔비디아의 최첨단 AI용 GPU ‘블랙웰’이 앞으로의 AI 시대 발전을 좌우하는 장치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블랙웰은 올 3월 엔비디아의 연례 개발자 회의인 ‘GTC’에서도 발표한 적 있는 칩이다. 기존 최고 성능의 GPU였던 H200의 5배에 달하는 40페타플롭스(초당 부동소수점 처리) 연산이 가능하다. 이미 AI 기업들이 블랙웰의 출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황 CEO는 “차세대 산업혁명이 시작됐고 AI라는 새 상품을 생산하는 엔비디아는 다음 성장의 물결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며 “신제품 블랙웰이 본격 제조 중으로 이번 분기 출하되기 시작해 다음 분기에는 생산량이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AI 반도체 흐름을 엔비디아의 블랙웰이 주도하게 되면서 한국 반도체 업계 역시 황 CEO의 메시지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블랙웰에 탑재될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을 위해 분전하고 있다.
그는 HBM과 함께 저전력 D램인 LPDDR D램의 활용도에도 주목했다. 블랙웰과 함께 AI 연산을 제어하는 중앙처리장치(CPU) ‘그레이스’에는 HBM이 아닌 LPDDR 메모리가 주변에 탑재된다. 적은 전력으로도 높은 성능을 낼 수 있어 AI 데이터센터 기업들이 고민하는 과도한 전력 사용량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황 CEO는 “LPDDR은 데이터센터를 운영할 수 있는 메모리로 많은 전력을 절약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만의 또 다른 무서운 점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챔피언인 TSMC의 존재다. TSMC는 올해 컴퓨텍스에서 대대적인 공장 증설 계획을 공개했다. 중국시보 등 대만 언론에 따르면 TSMC는 올해 공장 7개를 추가로 건설한다고 이번 행사에서 발표했다. 반도체를 직접 생산해내는 팹은 3곳이고 패키징 공장은 대만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2곳씩 지을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TSMC는 ‘칩 온 웨이퍼 온 서브스트레이트(CoWos)’와 같은 첨단 패키지 공정을 앞세워 애플·엔비디아 등 빅테크 물량을 싹쓸이 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대만이 한국을 이미 앞질러 한국이 미국, 대만에 이은 3등 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몰려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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