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의 두뇌가 야드를 떠나고 있습니다. 한번 떠난 인력은 돌아오지 않고 신규 지원자를 찾기는 더 어렵습니다.”
이달 초 방문한 국내의 한 조선소에서는 10여 년 만에 찾아온 조선업 호황의 열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오히려 임직원들 사이에서는 “이대로라면 미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기자와 만난 한 조선소의 인사 담당자 A 씨는 “동남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외국인 근로자들이 들어와 하드웨어 인력난의 급한 불을 껐지만 소프트웨어로 볼 수 있는 연구·설계 인력들은 사실상 충원이 막혀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청년 두뇌들의 해외 이탈 현상이 제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의대→해외 빅테크→국내 첨단 대기업’ 순으로 인력 쏠림 현상이 나타나면서 전통 제조업에서 인력 붕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산업이 철강·조선·화학 등 이른바 중후장대 산업이다. 상대적으로 노동 강도가 심하고 연봉과 처우가 박하다 보니 두뇌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실제 24일 서울경제신문 취재 결과 조선업 ‘에이스’들의 산실로 통했던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지난해 학부생 졸업생 중 조선소에 취업한 사람은 고작 3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야 할 두뇌 대부분이 다른 업종으로 노선을 변경한 셈이다.
김용환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복수전공·부전공 제도를 통해 국내는 물론 글로벌 컴퓨터·반도체·인공지능(AI) 관련 분야로 취업을 하고 있다”며 “특히 조선 3사의 경우 연구 인력의 80% 가까이가 석박사로 구성됐는데 조선해양공학과 학부생조차 대학원 진학 시 같은 분야로 가는 비율이 30%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두뇌 공백은 조선업의 생존 문제로 직결된다. 현재 국내 조선 업계는 호황기를 맞아 3년 치가 쌓여 있는 수주 물량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1만 명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를 채용하면서 어느 정도 인력난을 해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고부가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선박의 구조와 설계, 신기술 개발 등은 사정이 다르다. 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 따르면 2014년 2200명이 넘던 조선소 연구 인력(조선 3사와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은 올해 2월 기준 약 1300명으로 1000명 가까이 줄었다.
국내 조선사들이 고부가가치면서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는 선박 위주로 수주에 나서고 있는 만큼 이런 현상은 장기적인 경쟁력 악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조선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외국인들이 대체한 생산 현장조차도 이들이 단기 근무 뒤 본국으로 돌아가고 고참급 국내 근로자들이 은퇴하면 생산 노하우까지 끊길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인력 공백을 해소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당장 대졸 초임 기준 조선 3사의 평균 연봉은 4800만~5400만 원 수준으로 7000만 원이 넘는 반도체 기업 등과 2000만 원 이상 격차가 벌어졌다.
조선업뿐만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조선업은 물론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고 지방에 위치한 철강·기계 등 중공업 현장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AI·반도체 등 첨단 산업을 뒷받침할 후방 산업은 이미 뿌리에서부터 고사하고 있다는 의미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30대의 제조업 취업자 수는 105만 7000명으로 2014년(124만 7000명) 대비 19만 명이 급감했다. 20대 이하는 2014년 62만 5000명에서 지난해 55만 5000명으로 7만 명 감소했다. 지난해 제조업에서 60세 이상 취업자 수가 20대를 뛰어넘은 건 2014년 산업 분류 개편 이후 처음이다.
우리 경제의 새로운 먹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방산 업종에서 인재 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최근 러시아와 유럽·중동 등을 중심으로 지정학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국내 방산 기업들이 잇달아 수출 잭팟을 터트리자 개발 인력부터 생산직에 이르기까지 해외 기업들의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록히드마틴 등 글로벌 방산 기업들이 역대 가장 빠른 속도로 인력 채용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방산 경쟁력이 커지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 등이 그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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