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치동 학원가에는 ‘집 팔아도 안 되는 국어’라는 말이 있다. 국어는 어떤 고액 학원을 다녀도, 일타 강사를 붙여도 단기간에 성적을 끌어올리기가 어렵다는 의미다. 18년째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민애(45)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는 ‘집 팔지 않아도 국어가 된다’는 믿음의 소유자다. 서울대 기초교육원에서 만난 나 교수는 “국어 공부는 지름길이 없고 어릴 때부터 꾸준히 독서하는 게 해답”이라며 “국어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범위가 사실상 무한대인 특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 교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2007년부터 글쓰기 강의를 맡아왔다. 서울대 학생들로부터 강의 평가 1위를 기록하면서 ‘갓민애’라는 별명을 얻었다. 본업인 글쓰기 강의 외에도 독서 전도사를 자임하며 온·오프라인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독서 지도법과 국어 공부법은 여러 유튜브 채널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제가 광야에 나가 ‘책 읽으세요’라고 떠들면 누가 듣겠습니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잖아요. 독서의 중요성을 자라는 아이들에게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엄마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엄마들은 보수적으로 선택합니다. ‘이렇게 하면 공부 잘해요’라고 하면 귀를 기울이겠죠.”
서울대 신입생, ‘초등 때 책 많이 읽었다’ 69% 응답
나 교수가 올 3월 ‘국어 잘하는 아이가 이깁니다’라는 제목의 독서 지도법 신간을 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은 독서광이 국어 달인을 만든다는 게 요지다. 나 교수는 “독서는 장기 투자”라며 “읽기라는 인풋은 가랑비에 옷 젖듯 아주 긴 시간, 느리게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이어 “아웃풋이 금방 나오지 않는다고 조급증을 느낄 수 있겠지만 독서의 힘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 제목이 오글거리기는 해요. 그래도 출판사가 정한 제목에 동의했습니다. 엄마들이 읽어야 아이들이 좀 더 책을 많이 읽고 어릴 때 독서 습관도 들이지 않겠어요. ”
책에는 나 교수가 3년 동안 서울대 학생을 가르치면서 진행한 독서 실태 조사가 담겨 있다.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교 때 책을 많이 읽었다는 응답 비율은 69%에 이른다. 나 교수는 “학생들이 보수적으로 응답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학기당 100명의 신입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인데 놀라운 것은 매번 70% 안팎의 비슷한 응답 비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독서량과 학업 성적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봐야겠죠.”
그는 “굳이 3년 연구 결과를 담은 건 독서의 힘을 믿지 못하고 학원 뺑뺑이만 돌리면 될 것이라는 부모들의 의식을 바꾸자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AI 챗봇 시대…쓰기는 쉬워지지만 읽기는 더 중요
아이들이 책 읽는 습관을 들이는 데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워킹맘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도 세 번이나 교수직을 때려치우려 고민했고 이민도 생각했다고 했다. “일이 많을 때는 밤 9시에 돌아옵니다. 집은 엉망이고 아이들 씻기고 재워야 하는데 책 읽어주기가 쉽지 않죠. 워킹맘은 여기서 절망합니다. 그래도 주말에는 노력하셔야 합니다.”
나 교수는 독서 학원이나 국어 학원에 보내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독서 지도가 정 힘들다면 재미있는 책을 읽는 학원을 보내는 것을 추천합니다. 다만 숙제가 많은 학원은 끊어야 해요. 독서가 숙제라는 생각이 들면 흥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독서가 비단 모든 학습의 기본이 되는 국어 실력의 바탕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아이가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독립된 존재로 자라고 어려움을 헤쳐가는 힘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그는 “문해력은 사고력과 창의력 같은 두뇌 활동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인공지능(AI) 챗봇 시대에 독서의 미래에 대해 “챗봇이 글쓰기에 할애하는 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만 읽기 능력은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AI 기술이 고도화할수록 챗봇이 쓴 텍스트의 수준이 높아져 사용자의 읽기 능력이 좋아지고 어휘력도 높아져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가끔 책 곰팡이 냄새가 그리워 …아버님(나태주 시인)은 스승이자 선배
‘문학사상’ 신인 문학상으로 등단한 문학 평론가이기도 한 그는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79) 시인의 딸이다. 시인이자 교사인 아버지 덕에 어릴 때 책 속에 파묻혀 풀꽃 같은 문학소녀로 자랐다. 그에게 독서는 가풍이라고 했다. “방 세 칸짜리 단독주택에 살았죠. 식구 네 명이 한 방을 쓰고 아버지의 공부방이 있고 다른 하나는 책 창고였어요. 서재가 아니라 책장 없이 책을 막 쌓아두는 창고였는데 대충 만들어 습기가 차고 책에는 곰팡이가 슬었죠. 가끔 그 곰팡이 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어요.”
‘나 시인이 어떤 존재였냐’고 묻자 나 교수는 “스승이자 선배”라고 답했다. 두 사람은 함께 에세이집(나만 아는 풀꽃 향기, 2023년)을 내기도 했고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제로 한 동영상도 찍을 정도로 부녀의 정이 각별하다. “어릴 때 아버님 문우(文友)들이 집에 찾아와서 밤 늦도록 시를 두고 토론을 했던 기억이 많아요. 그때 오셨던 분들을 나중에 시집으로 만났습니다. 제게는 큰 행운이었죠.”
“책이 더 많이 읽히면 조금 더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라는 이상적인 생각을 해요. 너무 짧은 동영상 탓인지 사람들이 급해지고 참을성도 없어지는 것 같아요. 폭풍이 몰아치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런 인내심은 진득하게 독서하면서 길러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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