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프랑스를 물리치고 최소 24조 원, 많게는 48조 원에 이르는 체코 원전 수주에 성공하면서 K원전의 해외 진출을 더 확대하기 위한 원전 수출 지원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법 제정 과정에서 정치권의 협조가 필수적인 만큼 이념에 치우친 ‘묻지마식’ 반대보다 국가 차원의 전략 수출 산업을 키울 수 있도록 야당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윤석열 대통령은 18일 “우리 원전 산업이 전반적으로 고사 직전에 몰렸었는데 탈원전 정책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서 다시 원전 산업을 회복시켰다”며 “우리 산업 전체가 또 우리 지역 전체가 큰 혜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안팎에서는 ‘팀코리아’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값진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가 흘러나온다. 안덕근 산업부 장관은 “원전의 본산지 유럽에 원전을 수출하는 교두보가 마련됐다”며 “해외 원전 사업은 국가 대항전이자 국가 총력전”이라고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다. 체코를 기반으로 폴란드와 루마니아 등 유럽과 중동 지역에서 원전을 추가 수주하기 위해서는 원전 수출 지원법이 필수라는 얘기가 지배적이다. 한양대 산학협력단에 따르면 원전 수출에 관한 법률은 현재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강천구 인하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두산에너빌리티나 삼성엔지니어링 등 민간기업이 (원전 관련해) 해외로 진출하는 데 규제가 되는 것들을 없애고 수출 지원을 해주는 건 법으로 해야 하는데 그런 법이 없다”며 “금융 지원이나 수출을 위한 법적 규제 같은 것들을 살펴서 다른 나라에 비해 획기적으로 도와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원전 수출을 위한 협의체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2022년 출범한 원전수출전략추진위원회는 법적 조직이 아니며 상설 기구도 아니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원전을 기반으로 신재생에너지를 더해 무탄소 시대로 나가야 한다”며 “야당이 덮어놓고 원전을 반대만 할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전기 수요 증가·탄소중립 목표…원전 필요성 커진다
미국 상원 환경·공공사업위원회가 9일(현지 시간) “초당적으로 추진된 미국 원자력발전법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서명했다”고 밝혔다. 원전 인허가를 촉진하는 법인데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의 지지로 2월 하원을 통과했고 지난달에는 상원에서도 가결됐다. 현재 공화당과 민주당은 11월 대통령 선거를 두고 맞서고 있다. 하지만 원전에 관해서는 초당적 협력을 보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공지능(AI) 확산과 데이터센터 수요 확산에 따른 안정적 전기 공급이 필수인 데다가 2050년 탄소 중립을 위해서는 원전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모습은 다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는 지난달 정부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실무안에 대해 “2030년 재생에너지 비중 목표를 전혀 상향하지 않았다”며 “신규 원전 4기를 건설한다는 구상을 밝혔는데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원전 확대에 대한 거부감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문재인 정부 시절 5년간 원전 생태계가 붕괴된 이후 이번에 체코 신규 원전을 수주하면서 한국의 원전 생태계가 완전히 되살아나고 있는 만큼 야당이 원전 수출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원전 수출을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국내 원전을 지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정치권의 전향적인 판단이 절실하다는 조언이 제기된다.
방산·무역 ‘패키지 딜’ 개발…SMR·연구용 수출 라인업 만들어야
전문가들은 당정과 야당이 힘을 모아 원전 수출지원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 차원에서는 원전 수출을 위해 방위산업이나 무역 지원 등 한국이 강점이 있는 부문을 수출 시 엮는 ‘패키지 딜(package deal)’을 검토해볼 만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는 원전 수출이 각 나라가 가진 자원들의 종합 경쟁 무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한수원과 함께 원전 수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방산과 원전의 운영 노하우까지 하나로 묶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체코에 보낸 친서에도 원전 협력에 그치지 않고 전방위적인 산업 협력을 확대하자는 제안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원자력 업계의 한 관계자는 “원전 수출은 각국의 대통령이 직접 전면에 나서고 외교와 홍보, 산업, 문화 등 한 나라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싸움”이라며 “원전은 기본적으로 안보와 관련이 돼 있는 측면이 강한 만큼 한국이 강점이 있는 방산 수출이나 주요 기업 간 협력, 경제정책 경험 등을 한데 묶어 수출하는 게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여러 부처로 나뉘어 있는 원전 수출 및 진흥 체계를 가다듬고 협의체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현재 원전의 경우 산업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외교부, 원자력안전위원회 등으로 업무가 나뉘어져 있다. 한국형 소형모듈원전(SMR) 개발 작업도 원안위가 규제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앞으로는 대형 원전뿐만 아니라 SMR과 연구용 원자로 등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수출 지원을 위한 원전 수출 위원회에 법적 권한을 부여하고 전방위 수주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제기된다. 실제로 SMR은 기존 대형 원전보다 발전 용량과 크기는 작고 안전성은 높은 300㎿급 이하 차세대 원전이다. 기존의 대형 원전보다 사업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초기 투자금도 적어 위험 부담이 덜한 데다 모듈 등 동일한 유형의 소형 원자로를 건설하면 비용을 추가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SMR은 안전성과 경제성·운용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차세대 미래형 원전으로 주목을 받고 있어 향후 핵심 수출 품목이 될 수 있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원전은 대표적인 규제 산업이고 규제 혁신 없이는 원전 산업을 발전시키기가 대단히 어렵다”며 “신기술 SMR 같은 것을 도입할 때 신기술을 적극 수용할 수 있도록 규제 변화에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전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탄소 중립을 위해서는 원전이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며 “유럽도 원자력을 확대하겠다고 선언한 상황이고 유엔도 기후변화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원자력을 꼽은 만큼 정부와 국회 차원의 대대적인 지원이 요구된다”고 언급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