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채 시장이 연내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을 선반영하면서 발행시장은 강세를 보이는 반면 유통시장에는 적극적인 매수세가 형성되지 않는 뚜렷한 온도 차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 금리 인하에 한 발 앞서 신용 스프레드(회사채 금리-국고채 금리)가 빠르게 축소하자 시장 참여자 사이에서 채권 금리가 내려갈 대로 내려갔다는 인식이 퍼진 탓이다. 발행시장과 유통시장의 괴리가 장기화할 경우 채권 가격 왜곡이 발생할 수 있어 투자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21일 금융투자협회 채권정보센터에 따르면 이달 공모 회사채 수요예측 자금 유입 강도는 19일 기준 4.21배로 나타났다. 전년 동월의 2.97배, 2021년 7월의 1.48배에 비해 월등히 강한 모습이다. 자금 유입 강도란 발행 회사의 공모채 수요예측에 참여한 기관투자가들의 총주문액을 모집액으로 나눈 수치다. 자금 유입 강도가 높을수록 신용채권에 대한 투자 수요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 들어 회사채 자금 유입 강도는 1월을 제외하고 매달 전년 대비 높았다.
실제로 7월 공모채 발행을 위해 수요예측을 진행한 17개 기업 중 16곳이 모집액의 수 배에 달하는 유효수요를 확보하며 ‘완판’에 성공했다. 건설사 DL이앤씨(AA-)는 1000억 원 규모 수요예측에서 8050억 원어치 주문 물량을 받았고, 신한투자증권(AA)은 1500억 원 모집에 무려 1조 500억 원의 매수 주문을 받았다. 신용등급이 BBB급으로 가장 낮았던 두산퓨얼셀 수요예측에도 모집액(400억 원)의 6배가 넘는 주문(2450억 원)이 들어왔다. 수요예측 결과 대부분 민평금리(민간 채권 평가사들이 평가한 기업의 고유 금리)보다 낮은 수준에서 유효수요가 형성됐다. 시장이 평가하는 회사채 가격보다 더 비싸게 사려는 투자자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수요예측에서 유일하게 미매각을 기록한 롯데건설도 19일 모집액(1500억 원)의 절반이 넘는 유효수요(770억 원)을 확보했다. 롯데건설은 2년 만에 롯데케미칼(AA+)의 신용 보증 없이 공모채 발행에 나섰는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방한 결과라는 평가다.
회사채 시장의 발행 강세는 비우량채에서 두드러졌다. 비우량채의 자금유입강도는 롯데건설 미매각에도 불구하고 4.62배로 우량채의 자금유입강도(3.83배)보다 높았다. 상대적으로 고금리 채권에 대한 시장 수요가 더 높았다는 의미다.
이 같은 발행 강세는 금리 인하 시기 쿠폰금리(만기일에 지급하기로 약정한 금리)가 높은 신용채권에 대한 투자 매력도가 크기 때문이다. 현재 3년물 기준 ‘A+’급 회사채 금리는 연 3.9% 수준이고 ‘BBB+’급은 연 7.1%가 넘는다. ‘AA-’급 우량채도 기준금리보다 높은 연 3.5%대에서 쿠폰금리를 형성하고 있다. 비우량채 투자자와 우량채 투자자의 투자 성향 및 전략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최근 예적금 금리는 내리고 대출금리만 오르는 상황에서 신용채권 투자에 대한 관심은 견조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발행 시장의 강세가 신용 스프레드 축소를 과도하게 부채질해 거래량 감소 및 약세 거래 증가라는 유통 시장 위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회사채 회전율은 올 1월 6.74%에서 지난달 4.50%로 우하향 곡선을 그렸다. 회사채 회전율은 회사채 거래량을 발행 잔액으로 나눈 수치로 시장에 유통 중인 회사채의 거래 활력도를 보여주는 지표다. 19일 기준 이달 회사채 회전율은 2.36%다. 일평균 거래량이 5746억 원으로 지난달(8052억 원) 대비 크게 줄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종 월 회전율이 3% 중반대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월별 회사채 회전율이 3%대를 기록한 적은 지난해 12월 이후 없었다.
또 DB금융투자증권에 따르면 민평금리와 당일 금리 변동분을 반영해 7월 중 회사채 100억 원 이상 거래를 분석한 결과 약 절반이 약세 거래(채권 가격 하락)에 해당됐다.
이는 회사채 금리 인하 속도가 과도하게 빨랐던 탓으로 ‘AA-’급 회사채 3년물 금리에서 국고채 3년물 금리를 뺀 신용 스프레드는 올 초 74bp(1bp=0.01%)에서 19일 45.1bp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0.5→0.75%)한 2022년 8월 수준(42~43bp)까지 스프레드가 축소된 것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회사채 금리 상승에 바탕한 스프레드 확대 위험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반기 신용채권 공급 확대 부담도 유통 시장 약세를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하반기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 규모는 약 18조 원으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상반기 발행이 적었던 공사채, 한전채 등 초우량 채권 발행이 늘어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업계에서는 신규 채권 투자 수요를 고려하면 수급 악화 가능성이 제한적이라고 보고 있지만, 유통 채권의 스프레드 확대 위험성은 커졌다는 시각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채권 가격이 과열됐다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김은기 삼성증권 연구원은 “국채금리 수준을 고려하면 현재 신용 스프레드는 201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라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와 신용등급 하락 추세를 감안할 때 높아진 신용 위험 대비 스프레드 수준에 대한 부담감이 크다”고 경고했다.
박경민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유통 시장에서 매수·매도 호가 대응이 잘 안되는 상황이 지속되면 매도 물량이 터무니없이 싼 가격(채권 금리 상승)에 나와 민평금리를 올리는 가격 왜곡이 나타날 수 있다”며 “통화 정책 면에서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해소되기 전까지는 발행·유통 시장의 괴리가 단기간에 해소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성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레벨 부담으로 스프레드 강보합권 흐름이 예상된다”며 “스프레드 추가 축소 여력이 존재하는 만기, 등급, 분야를 중심으로 키맞추기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