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가를 비롯한 글로벌 금융 업계가 기술 인력 유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디지털 혁신 기술은 기존 금융 업무와는 전혀 다른 영역인 만큼 은행·증권사·사모펀드 등 가릴 것 없이 전 금융사들이 앞다퉈 인재 영입과 육성을 위한 교육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특히 AI 기술은 금융 산업의 생산성 향상과 새로운 서비스 개발에 핵심 키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월가나 런던 금융계에서 AI 관리자 또는 AI 엔지니어링 관리자, 클라우드 보안 책임자 등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품귀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필요한 기술 인력을 영입하기 위해 이른바 ‘7자리 숫자(수백만 달러)’의 연봉도 과감히 제시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AI 시스템을 운영하는 임원의 연봉은 200만 달러(약 27억 원)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AI 기반의 금융 상품을 총괄하는 책임자는 최대 65만 달러(약 8억 8000만 원)의 보수를 받기도 한다.
글로벌 금융사들이 파격적인 연봉을 제시하면서까지 디지털 테크 인력을 모시는 것은 전 산업 분야에서 치열한 인재 영입 경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금융센터의 ‘글로벌 은행들의 인재 확보 경쟁’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글로벌 은행들은 디지털·기술 인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20년 1월부터 2022년 4월까지 골드만삭스에서 총 147명의 직원이 핀테크 기업으로 이직했다. 미국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코인베이스로의 이직만 37명에 달했다. 핀테크 기업 브렉스와 소파이로는 각각 21명, 18명이 자리를 옮겼다. 수평적인 조직 구조를 바탕으로 한 핀테크 기업들이 유연한 근무 환경과 스톡옵션까지 제공하며 인재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계는 즉시 전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테크 인재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라며 “금융과 테크의 접목 속도가 빨라지면서 금융사 운영과 기술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월가를 비롯한 글로벌 대형 금융사들은 AI 기술을 토대로 사업 영토 확장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이미 수년간 AI 시스템을 이용해왔으며 거래, 리스크 관리, 사기 탐지, 투자 연구 자동화에도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해왔다. 또 고객 서비스, 자산 관리 및 운용 등 분야에 AI를 적용하는 다양한 고객 맞춤형 서비스도 보편화되고 있다. 단순히 상품 추천 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고객의 재무 목표, 위험 성향 등을 고려한 AI가 프라이빗뱅커(PB) 역할을 대신하는 수준까지 올라선 상황이다.
JP모건체이스는 올 5월 오픈AI 모델을 이용한 투자 분석 서비스 ‘인덱스GPT’를 출시했다. 인덱스GPT는 오픈AI의 GPT-4 모델을 기반으로 만들었다. 기존 지수와 달리 인덱스GPT는 뉴스 기사에서 추출한 AI 생성 키워드를 활용해 새로운 트렌드를 기반으로 투자 모델을 만든다.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9월 PB들의 업무를 지원하는 생성형 챗봇 ‘AI 모건스탠리 어시스턴트’를 선보였다. 최근에는 오픈AI의 GPT-4를 기반으로 한 ‘AI 모건스탠리 디브리프’도 도입했다. 오픈 AI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된 디브리프는 콘퍼런스콜의 핵심 내용을 자동으로 녹음·기록·요약한다. 디브리프가 PB들에게 필요한 e메일을 작성하고 통화 내용을 내부 시스템에 자동으로 기록하는 덕분에 모건스탠리 경영진은 회사 전체에서 이뤄진 모든 통화의 분석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뱅가드는 2015년 로보어드바이저(RA) 기반 연금 자문 서비스인 ‘퍼스널 어드바이저 서비스’를 출시했다. 2020년에는 젊은 고객을 타깃으로 연금 컨설팅과 은퇴 설계 기능을 강화한 완전 비대면 RA 플랫폼 ‘디지털 어드바이저’를 새롭게 내놓기도 했다. RA는 자체 AI 알고리즘으로 계정을 모니터링하고 포트폴리오를 조정한다.
시장에서는 앞으로 테크 운영·기술 두 분야를 아우르는 ‘테크 리더’가 금융사의 핵심 인재로 부상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존에 내부 정보기술(IT) 인프라를 책임지는 최고정보책임자(CIO)와 엔지니어링과 제품을 개발하고 감독하는 최고기술책임자(CTO)로 나뉘었던 업무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파운드리가 실시한 ‘2023 CIO 현황 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참여한 IT 리더 응답자의 84%가 “다른 비즈니스 리더에 비해 디지털 혁신을 주도하는 데 더 많이 관여하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업무의 연속성이 중요해지고 다양한 시스템을 망라하는 인재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CIO와 CTO의 경계 역시 흐릿해지는 추세”라며 “테크 혁신을 감독하는 직책을 CIO가 맡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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