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일상의 필수 요소가 된 인터넷과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은 처음에는 미국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군사 목적으로 개발한 기술이다. 1958년 냉전 중 군사·안보 분야 첨단기술 개발을 목표로 만들어진 DARPA는 위험 부담이 크더라도 파급효과가 막대한 기술에 집중한다. 200명이 조금 넘는 DARPA 직원 중 절반 정도는 외부에서 영입한 과제 전문관리자(PM)다. 이들은 연구 과제의 기획·선정, 팀 구성, 과제 진행, 예산편성·집행 등에 있어 독립된 재량권을 갖는다. PM을 중심으로 하는 수평적이고 신속한 의사 결정 체계는 연구개발(R&D)의 숙명이라 불리는 실패의 가치를 용인할 뿐 아니라 이를 활용하는 문화와 함께 인류의 미래를 바꿀 혁명적 R&D에 도전하게 한다.
우리도 기술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고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혁신적·도전적 DNA를 R&D에 접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R&D 환경과 제도하에서는 연구자들이 불확실성, 실패 가능성, 난도가 높은 연구에 나서기 쉽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꿔 과감하고 창의적인 R&D를 시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난해 11월 정부는 세계 최초·최고에 도전하는 선도형 R&D로의 전환을 이끌어내기 위해 ‘윤석열 정부 R&D 혁신 방안’을 수립하고 이어 ‘혁신적·도전적 R&D 육성 시스템 체계화 방안’을 마련했다. 아울러 34개의 ‘혁신도전형 R&D 사업군’을 지정하고 ‘APRO(혁신도전형) R&D’라는 정책 브랜드를 만들었다.
혁신도전형 R&D 사업군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양자, 바이오, 로봇, 원자력, 우주항공, 첨단 소재, 차세대 통신, 국방 등 분야에서 세계 최초·최고를 지향하거나 우리나라가 우위에 있어 경쟁국들과의 격차를 더 벌리고자 하는 사업들이 망라돼 있다. 또한 ‘APRO’라는 이름은 우리말로 ‘앞으로’, 이탈리아어로 ‘문을 열다’라는 뜻을 갖는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먼저 나아가는 퍼스트 무버로서 미래의 문을 열어가자’는 포부를 담고 있다. 각 알파벳(A·P·R·O)은 최고에 도전하고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에임 하이(Aim High)’, 우리에게 닥친 난제 해결을 목표로 한다는 ‘프라블럼 솔빙(Problem Solving)’, 지금껏 시도해보지 않은 획기적 방법론을 도입하자는 ‘레볼루셔너리(Revolutionary)’, 성실한 실패는 용인하고 경험을 바탕으로 재도전할 문화를 지향하자는 ‘오버 앤드 오버(Over & Over)’를 뜻한다.
정부는 APRO R&D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전과는 차별화된 지원 방식인 ‘R·N·D’에 중점을 둘 생각이다. 먼저 ‘규제 프리(Regulation free)’로 최대한 규제를 풀어 유연성과 신속성을 부여한다. 연구자들이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단순히 성공과 실패로 양분하는 평가는 없애고 정성적 지표 기반의 컨설팅으로 전환한다. 또 DARPA와 같이 PM에게 과제 관련 전권을 부여하고 필요시 시설·장비 도입 기간 단축과 성과 목표의 빠른 변경 등이 가능하게 할 것이다. 둘째, ‘노 실링(No-Ceiling)’으로 예산의 제약을 가급적 없애고자 한다.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불가피한 만큼 재정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투자를 고려하고 보다 유연하고 신속하며 안정적인 예산집행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이렉트 커뮤니케이션(Direct communication)’으로 소통은 곧바로, 직접 해야 한다. 혁신적·도전적 연구 문화의 정착과 확산을 위해서는 부처, 연구 관리 전문기관, 연구자, 기관 등 모두가 힘을 모아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빈번하고 진일보한 소통과 협력은 필수 불가결하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6월 의결한 내년도 주요 R&D 예산안은 올해보다 증가한 24조 8000억 원이다. 일반 R&D를 포함한 전체 R&D 예산안은 역대 최고였던 지난해 수준을 충분히 넘어설 것이 확실시된다. 그 가운데 APRO R&D 예산은 1조 원으로 3% 수준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성인의 혈액 4~5ℓ 중 심장 내 혈액은 0.14ℓ로 3%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 전체 R&D 예산의 3%를 차지할 APRO R&D가 R&D 생태계의 역동성을 높이고 가지 않은 길을 가도록 담대한 용기를 불어넣는 ‘심장’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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