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부터 뇌졸중으로 인한 시야장애를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기기의 처방이 시작된다. 효과적인 치료법이 없는 난치성 시야장애 분야에서 국내 의료진이 개발한 디지털 치료기기가 세계 첫 상용화에 성공한 사례다. 시야장애로 고통 받는 전 세계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부여하는 한편 국산 의료기기의 글로벌 시장 진출에도 탄력이 붙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다.
22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제3호 디지털 치료기기 ‘비비드 브레인(VIVID Brain)’의 첫 처방이 다음달 중순께 서울아산병원에서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흔히 ‘디지털 치료제’로 불리는 디지털 치료기기는 의학적 장애나 질병을 예방·관리 또는 치료하기 위해 환자에게 근거 기반의 치료적 개입을 제공하는 일종의 의료용 소프트웨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2017년 9월 페어테라퓨틱스의 ‘리셋’을 허가하면서 세계 첫 디지털 치료제가 출시됐다. 국내에서는 2023년 2월 에임메드가 불면증 치료 용도로 개발한 ‘솜즈’가 허가를 받으며 디지털 치료제 시장의 포문을 열었다.
비비드 브레인은 신경과 전문의인 강동화 서울아산병원 교수와 디지털 치료기기 전문기업 뉴냅스가 개발했다. 시각 자극에 대한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자극에 대한 지각이 향상되는 현상인 시지각학습 훈련법을 가상현실(VR) 기반 모바일 앱으로 구현했다.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손상된 뇌졸중 환자에게 시지각학습 훈련을 제공해 뇌가소성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임상연구를 통해 효과 검증을 마쳤다. 병변 주변의 잠자는 뇌를 깨워 시지각 기능을 회복시키는 개념이다.
시야장애는 눈과 시신경은 정상이지만 시각피질인 후두엽이 손상돼 시각정보의 일부를 인식하지 못하는 질환이다. 뇌졸중 환자의 약 15~20%는 시야장애로 인해 운전, 독서, 계단 오르내리기 등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좁아진 시야 탓에 사고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도 높다. 고령화 추세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뇌졸중 유병률이 증가하면서 시야장애와 같은 신경학적 후유증의 발생도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비비드 브레인이 허가받기 전까지는 표준화된 치료법이 없었다.
비비드 브레인은 국내 의료기관 12곳에서 뇌질환으로 인한 시야장애 환자 100여 명을 대상으로 확증 임상시험을 진행해 시야 민감도가 유의미하게 호전됐음을 입증했다. 이를 토대로 지난 4월 식품의약품안전처 품목허가를 받았다.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뇌졸중으로 인한 시야장애 개선에 안전하고 잠재성이 있는 혁신의료기술로 평가받았고 6월 27일 복지부 고시가 발령됨에 따라 의료현장에서 비급여 처방이 가능해졌다. 뇌졸중 후 후유증으로 시야장애가 생긴 성인 환자는 의료진으로부터 비비드 브레인을 처방받아 12주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개인별 맞춤형 알고리즘으로 훈련 받을 수 있다. VR 기기와 모바일 앱을 활용해 언제 어디서나 시지각 학습 훈련을 진행하고 결과를 확인하면 된다. 원격 모니터링으로 지속적인 관리도 가능하다. 건강보험 등재 전까지는 환자가 진료비를 전액 부담해야 하는데 구체적인 금액은 책정되지 않았다. 서울아산병원 외에도 다수 병원에서 도입 절차를 진행 중이어서 연내 처방 가능한 의료기관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세계 디지털 치료제 시장은 연평균 20~30%씩 커져 2035년 197억 6000만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비비드 브레인은 기존 서비스나 치료법의 보완이 아닌 ‘혁신 신약’이라는 점에서 잠재력을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강 교수는 “내년 초 유럽인증(CE)을 목표로 인허가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며 “유럽, 아시아, 중동 시장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국산 디지털 치료제가 세계 시장 주도권을 선점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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