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쪼록 큰 사업가가 돼 헐벗은 동포들을 구제하는 민족자본가가 되길 바라네.”(이육사 시인)
“반드시 큰 사업가가 돼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겠습니다.”(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교보생명 창립자인 대산 신용호(1917~2003) 회장이 청년 시절 항일 시인 이육사(1904~1944)를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만나 나눈 대화다. 신 창립자는 훗날 시인의 당부를 마음에 새기고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을 설립하며 창립 이념을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으로 삼았다.
신 창립자는 젊은 시절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가 다롄·베이징 등에서 사업을 했다. 이 시기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민족 기업가의 꿈을 키웠다. 특히 이육사와의 만남은 국가와 민족에 눈을 뜨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육사는 신 창립자에게 경술국치 이전 조선에서 벌어진 난맥상을 얘기하며 사업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때부터 신 창립자는 인재를 기르고 민족자본을 형성해 경제 자립의 기반을 구축하는 일을 평생의 사명으로 여기게 된다.
신 창립자가 1958년 대한교육보험 설립과 함께 신념을 담아 선보인 교육보험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상품이었다. ‘담배 한 갑 살 돈만 아끼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서민들에게 안겨줬다. 30년간 300만 명의 학생들이 학자금을 받았고 이들은 1960년 이후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육사로부터 영향받은 신 창립자의 신념은 교보문고 설립(1981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주변 사람 모두가 “광화문 네거리 금싸라기 땅에 돈도 안 되는 서점을 들이느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신 창립자는 “사통팔달 대한민국 제일의 자리에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현재 교보문고는 단일 면적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서점이다. 서가 길이는 무려 24.7㎞에 달한다. 회원 수 1800만 명, 연간 방문객 5000만 명에 이르는 명실상부한 ‘국민서점’이다.
신 창립자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이육사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교보문고 광화문점 교보아트스페이스에서 전시된다.
교보생명의 공익재단인 대산문화재단은 이육사 탄생 120주년 기념 시 그림전 ‘절정絶頂, 시인 이육사’를 이달 5일부터 29일까지 연다고 9일 밝혔다.
이번 전시에는 김선두·노충현·박영근·윤영혜·윤종구·이동환·이재훈·진민욱 등 8인의 화가가 참여한다. 이들은 이육사의 ‘광야’ ‘꽃’ ‘절정’ ‘청포도’ 등 20편의 시를 각자의 개성과 해석을 담아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총 24편의 그림이 전시된다.
이육사의 외동딸인 이옥비 여사와 유족들은 일반 전시에 앞서 6일 전시 현장을 찾아 작품을 감상했다. 이날 대산 신용호 선생의 아들인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겸 대산문화재단 이사장도 자리를 찾아 이육사 시인 유족과 선대의 염원을 기리고 그간의 소회를 나눴다. 신 회장은 “시인이 태어난 날로부터 한 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이육사 선생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며 “오늘의 자리가 이육사 시인을 기리는 의미 있는 자리로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재단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시인의 탄생과 순국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자리인 동시에 재단과 교보생명이 시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특별한 의미도 담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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