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에서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사용하는 소형 무선호출기 수천 대가 동시에 폭발해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스라엘이 배후로 지목된 가운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확전을 노린 무력 행동을 감행해 가자휴전 협상을 방해하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17일(현지 시간) CNN·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30분께부터 1시간가량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를 포함한 전국 각지의 군부대와 기관에서 사용하던 무선호출기 수천 대가 동시에 폭발했다.
레바논 보건부는 어린이를 포함해 최소 12명이 숨지고 약 3000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밝혔다. 부상자 중 약 200명은 위독한 상태다. 현장에서는 길가와 카페, 과일 가게 등에서 폭발 소리와 함께 피해자들이 나뒹굴었다. 모즈타바 아마니 주레바논 이란대사도 폭발 사고로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이송됐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과 서방국가 당국자를 인용해 이번 사건의 배후에 이스라엘이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익명을 요구한 레바논 안보 소식통도 헤즈볼라가 수입한 무선호출기에 이스라엘 대외 정보기관 모사드가 폭발물을 심었다고 주장했다. 당국자들은 헤즈볼라가 대만 골드아폴로에 무선호출기 약 5000대를 주문했으며 레바논 전역의 조직원들에게 배포했다고 말했다. 일부는 이란과 시리아 등 동맹국에도 전달됐다. 모사드는 해당 무선호출기가 제조 또는 유통되는 공급망을 뚫고 소량의 폭발물과 이를 원격으로 터뜨릴 수 있는 기폭 장치를 사전에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골드아폴로는 이날 성명을 내고 자신들은 상표 사용만 허용했다며 해당 기기들의 디자인과 제조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기반을 둔 ‘BAC컨설팅KFT’라는 업체에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가자전쟁이 발발한 후 헤즈볼라는 모사드의 첨단 기기를 활용한 도청 또는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무선호출기의 사용을 늘렸다. 헤즈볼라가 무선호출기를 대량으로 주문하자 이를 포착한 모사드가 공격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함구하고 있다. 다만 미국 매체 악시오스는 익명의 미 정부 당국자들을 인용해 당초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무력화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전면전을 개시하는 시점에 해당 폭탄을 사용할 계획이었다가 들킬 위기에 몰리자 터뜨렸다고 보도했다.
이는 헤즈볼라를 향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도 해석된다. 폭발 사건이 있기 직전 이스라엘 안보 내각은 가자전쟁의 목표를 헤즈볼라와 맞닿은 북부 전선 확보로 확대했다. 이스라엘군과 헤즈볼라의 무력 충돌을 우려해 대피한 자국민 6만 명의 ‘안전한 귀환’을 이유로 들었다. 사실상 확전 의사를 내비친 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레바논에서 무선호출기 폭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헤즈볼라는 18일 성명을 통해 “레바논 국민을 학살한 적에 대한 가혹한 대응을 하겠다”며 보복을 공언했다. 이란도 이스라엘을 공격 주체로 지목하며 맹비난했다. 나세르 칸아니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성명에서 “레바논에서 벌어진 테러는 시온주의자 정권(이스라엘)과 그 용병들의 합동 작전”이라며 “이는 도덕적·인도주의적 원칙과 국제법·국제인도법을 위반한 것으로 국제 형사 기소와 재판, 처벌을 받게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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