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기업의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지출이 전 세계 최하위권이라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제조 중심으로 쏠려 있고 매년 시설 투자 부담이 증가하고 있어 정부 보조금 지원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경쟁력이 빠르게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27일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가 발간한 ‘2024 반도체 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반도체 산업의 매출 대비 R&D 비중은 9.5%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1위 미국(19.3%)은 물론 유럽(14.0%), 일본(12.0%), 대만(11.0%) 등에도 밀렸다. 미국의 견제로 ‘반도체 굴기’가 지연되고 있는 중국(7.6%)만이 우리나라보다 R&D 지출 비중이 낮았다.
SIA는 보고서에서 “전 세계 경쟁자들이 R&D 투자 비용을 늘리며 미국에 도전하고 있지만 미국은 압도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리더십을 지키면서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설명했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금의 반도체 경쟁은 인공지능(AI) 기술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며 “경쟁의 승패에 따라 향후 10~15년의 먹거리가 좌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민관이 원팀이 돼 더욱 공격적으로 투자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R&D 투자를 늘리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상상 최악의 반도체 한파가 불어닥쳤던 지난해 삼성전자는 R&D에 28조 3500억 원을 쏟아부었다. 전체 매출 대비 R&D 비용은 10.9%에 달했다. 삼성전자의 매출 대비 R&D 비용 비중은 2021년 8.1%를 기록한 뒤 매년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다.
다만 강력한 R&D 투자가 앞으로도 가능하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매년 급증하는 시설 투자 비용이 만만치 않다. 웨이퍼 한 장에 담아낼 수 있는 저장 용량이 한계에 부딪혀 생산 라인을 증설하고 전체 웨이퍼 투입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공급을 늘려야 하는 탓이다.
여기에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같은 선단 메모리의 투자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SK하이닉스가 5세대 HBM3E 12단 양산에 착수해 경쟁자들을 따돌린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 번 양산 경쟁에 뒤처지면 후속작인 HBM4 8단, 12단에서도 계속 밀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정부 보조금 등을 등에 업은 글로벌 기업들이 R&D 지출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TSMC는 지난해 R&D에 1787억 위안(약 7조 5400억 원)을 썼는데 이는 대만 증권거래소 상장사 전체 R&D 비용의 약 25.8%에 해당한다. 2위를 기록한 미디어텍 역시 806억 위안(약 3조 4000억 원)을 썼다. AI 칩 시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의 2019~2023년 평균 연간 R&D 지출은 56억 달러(약 7조 4000억 원)였으며 이는 매출 대비 20%에 이른다.
일본 기업들의 R&D 공세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반도체 부활을 외치고 있는 일본의 매출 대비 R&D 비중은 2022년 8.3%에서 2023년 12.0%로 3.7%포인트나 상승했다. 일본이 약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부의 막대한 지원이 있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해 최첨단 반도체 기술센터(LSTC)를 설립해 450억 엔(약 4147억 원)을 투자했으며 현재 이 센터는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직접 하기 어려운 고난도·고비용 R&D를 중심으로 지원한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보조금 경쟁에서 뒤처지면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 경쟁은 국가 대항전으로 기업의 힘만으로는 승리를 확신하기 어렵다”며 “우리나라도 각종 규제에 얽매이지 말고 세제 혜택, 인프라 지원, 보조금 지급 등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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