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하룻밤 자고 올라가는데 뭐가 이렇게 많아?”
지방에서 열린 사촌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모님과의 1박 2일 여행길에 오른 저는 엄마의 캐리어 속 커다란 파우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60대가 무슨 화장품을 이렇게 챙겨왔느냐며 놀리려다 보니 수십 봉의 약봉지가 가득 들어있더라고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다”고 잔소리하며 일일이 따져 묻다 보니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40대에 진단된 고혈압, 고지혈증 약에 몇 년 전부터 속이 쓰리다며 먹기 시작한 위식도역류증 약, 다리가 붓고 저릿저릿할 때 타다 먹는 신경통 약, 혈류개선제까지 동네 의원에서 처방 받아 복용 중인 전문의약품만 7가지쯤 되더라고요. 희한하게 집을 떠나면 소화가 잘 되질 않는데, 지인에게 추천을 받았다는 출처 불명의 천연소화제에 마른기침이 날 때 좋다는 도라지 엑기스 등 건강기능식품까지 합치면 10가지가 훌쩍 넘어 보였습니다.
노년내과 전문의와 인터뷰하며 ‘약을 새로 처방하기보다 줄이는 게 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딱 그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이런 줄도 모르고 지난 추석 명절 때 홍삼 선물세트를 한아름 안겼으니 아찔했습니다. 부모님이 하루에 어떤 약을 얼마나 드시고 계신지 살펴보신 적 있으신가요? 노인의 날(10월 2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만큼 ‘다제 약물’의 문제점에 대해 얘기해보려 합니다.
독과 약은 한끗 차이라는 말이 있죠. 병을 고치려고 약을 먹지만 자칫 오남용하면 또 다른 병을 부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최근 의정갈등으로 인해 의료기관 문턱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우리나라는 해외 어느 나라보다 병의원 접근성이 좋습니다. 의약품 처방량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급여의약품 청구액은 25조6446억원으로 전체 진료비 107조4873억원의 23.9%를 차지했습니다. 청구액은 2021년 처음 20조원을 넘어선 데 이어 매년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내년에는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고 하니 약품비가 더욱 가파르게 증가해 건강보험 재정 부담을 가중시킬 것으로 예상되고 있죠.
통상 6종류 이상의 약물을 먹는 경우를 ‘다제 약물 복용(polypharmacy)’이라고 하는데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보윤 국민의힘 의원이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10~11종 복용자가 63만5044명, 12~14종 복용자가 42만9653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5종 이상의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는 2019년 2343명에서 2023년 5134명으로 2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죠. 전문가들은 처방이 반드시 필요하다기 보다는 새로운 증상들을 또 다른 약물로 메우려는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약물 연쇄 처방’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무릎 관절염 때문에 비스테로이드성항염증제(NSAID) 계열 약을 장기간 복용하다 보면 부작용으로 고혈압이 생길 수 있는데, 혈압약 때문에 신장의 기능이 저하돼 이뇨제를 추가하고 이뇨제로 인해 통풍이 생겨 통풍약을 추가하는 식이죠. 보통 위 보호제가 기본으로 깔리다 보니 질환마다 다른 병원에 다니는 환자들은 위 보호제만 4~5가지를 처방 받을 가능성도 큽니다. 사회적 비용 낭비일 뿐 아니라 환자 본인도 약물 간 상호작용, 중복 투약 등에 의한 문제에 노출돼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줄이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약 이력을 전문가가 꼼꼼히 확인하고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한데요. 건보공단은 2018년부터 다제약물 복용에 따른 건강위험을 줄이고 의료비 절감을 유도하기 위해 ‘다제 약물 관리 사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약사와 공단 직원이 10종 이상의 약을 두 달 이상 복용하는 환자의 가정을 방문해 복용약을 검토하고 상담을 통해 불필요한 약을 덜어내줍니다. 불현듯 나와 내 가족의 얘기인가 싶어 걱정이 된다면 공단에 사업 참여를 문의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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