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사회 이동성 대책 가운데 하나로 내놓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통합 작업이 지지부진한 것으로 확인됐다. ISA로 자산을 키울 기회를 청년들에게 제공해 계층 이동을 촉진하겠다는 게 정부 계획이었지만 별다른 진척이 없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ISA를 운용하는 금융사들은 수익률 제고보다 몸집 불리기만 지속해 ‘깡통 ISA 계좌’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4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국내 14개 은행·증권사로부터 제출 받은 ISA 계좌 운영 현황에 따르면 지난달 말 현재 A은행의 납입 금액 1만 원 이하 비중은 무려 88.2%에 달했다. 1만 원 초과~10만 원 이하 계좌를 포함하면 93.8%까지 치솟는다. A은행 ISA 계좌 10개 중 9개는 10만 원도 들어있지 않은 깡통 계좌다. B은행도 납입 금액 10만 원 이하 비중이 85.2%였다.
ISA 고객이 은행보다 많은 증권사도 마찬가지다. 8월 말 기준 ISA 계좌가 71만 3000개로 업계 1위인 C증권사의 경우 납입 금액 10만 원 이하인 계좌 비중은 76.9%였다. 계좌 45만 5000개가량이 1만 원밖에 들어있지 않은 셈이다. 통상 금융회사들은 실적을 채우기 위해 ISA 가입 시 1만 원을 준다는 식의 영업을 펼치는데 이후 추가 납입이 되지 않았다.
기획재정부는 5월 사회 이동성 개선 방안을 통해 ISA 통합을 포함해 ISA 제도 전면 개편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ISA는 신탁형과 일임형, 투자 중개형으로 나뉜다. 신탁형은 은행에서만 가입이 가능하다. 일임형은 은행과 증권을 통해 들 수 있으며 전문가가 대신 운용하는 형태다. 투자 중개형은 증권사에서만 가입이 가능하며 다른 유형과 달리 채권 및 국내 주식까지 투자할 수 있다.
당초 기재부는 세 가지 ISA를 통합해 가입자들의 선택지를 늘리고 자산 증식을 유도할 방침이었다. 하지만 계좌 통합 논의는 금융위원회가 우려를 표명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은행이 중개형 상품을 취급하거나 증권사에서 신탁형 상품을 운용하는 것이 업권 간 경계를 흐리고 리스크를 키울 수 있다는 논리였다. 쉽게 말해 은행과 증권이 서로의 업무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다 보니 ISA 계좌 통합을 위한 금융계의 의견 수렴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은행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ISA 계좌 통합 이슈와 관련해서 정부로부터 의견을 달라는 메시지를 받은 적이 없다”며 “그렇다 보니 아직 이렇다 할 입장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기술적인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ISA 계좌를 통합할 경우 고객이 각각의 유형별로 굴린 자산이 얼마인지를 합산하고 그에 따라 과세를 해야 하는데 이 같은 체계를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ISA 통합 시 한 금융지주회사 안에서도 은행과 증권사가 분리돼 있으니 이들 회사의 전산을 합쳐야 하는 것과 같은 과제가 아직 남아 있다”며 “계좌 통합을 검토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술적인 걸림돌이 있는 것은 맞다”고 설명했다.
민 의원은 “국민들이 효율적으로 자산을 키울 수 있도록 정부가 ISA를 전면 개편하겠다고 했지만 그 의지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며 “금융사들 역시 계좌 수를 늘리는 데만 급급해 ISA의 질적 제고는 고민하지 않아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다음 달 중 2차 사회 이동성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다음 달까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계좌 통합 논의를 시작한 이유 자체가 기본적으로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강화하고 ISA 계좌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것인 만큼 최대한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안을 구체화하겠다”고 해명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