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서울 강남구 내 한 행사장. 100여 명의 인원이 ‘22년차 마케터’, ‘5년차 프론트엔드 개발자’ 등 각자의 경력을 표현한 이름표를 달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최근 소속 기업의 구조조정이나 희망퇴직 실시로 직장을 떠난 퇴직자들이다. 이날 참석자들은 약 4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며 서로의 퇴직 경험과 앞으로 준비 중인 계획을 공유했다. 경력자 채용에 관심이 있는 채용 담당자 약 30명도 각종 기업에서 나와 구인·구직 상담을 했다.
국내 산업계에서 구조조정이나 희망퇴직 등이 빈번해지면서 퇴직자들이 새 직장을 찾는 모습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인맥에 의존해 알음알음 새 일터를 찾는 방식이 흔했다면 최근에는 퇴직자끼리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활로를 모색하는 방식이 점점 보편화하고 있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채용 솔루션 운영 기업 볼트엑스는 앞으로도 퇴직자만을 위한 네트워킹, 구직 행사를 개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박상우 볼트엑스 대표는 “별다른 홍보 없이도 참석자 100명을 모집하는데 400명이 지원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며 “새로운 커리어에 대한 퇴직자들의 강한 수요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보다 구조조정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퇴직자 행사가 흔하다. 과거 해고통지서를 분홍색 종이로 인쇄해 전달한 데 빗대 이런 행사를 ‘핑크슬립(분홍색 종이) 파티’라고 부른다. 2000년대 닷컴 버블이나 2008년 금융 위기 등 대규모 해고 사태가 있을 때면 핑크슬립 파티가 활발하게 열렸다. 볼트엑스도 이에 착안해 이날 행사를 핑크슬립 파티라는 이름으로 열었다. 박 대표는 “미국 사례를 따른 것도 있지만 퇴직자들에게 유쾌한 뉘앙스로 희망을 주고 싶었다”며 “앞으로 꾸준하게 동종 행사를 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행사 참석자들은 갑작스러운 퇴직에 따른 어려움 속에서 새 커리어를 모색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다. 신세계그룹에서 온라인 사업 마케팅과 광고 업무를 17년 동안 담당한 김준태(45) 씨는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받아 직장을 떠났지만 막상 일터가 없어지니 심리적인 어려움이 컸다”면서도 “퇴직을 기회로 활용해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업무와 전문성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스타트업이든 대기업이든 가리지 않고 새 직장을 찾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3년차 프론트엔드(사용자가 직접 쓰는 기능을 개발하는 영역) 개발자 배상준(30) 씨는 “다니던 기업이 희망퇴직을 실시하면서 직장을 떠나게 됐다”며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고민을 공유하고 채용 담당자도 만나고 싶어 행사장을 찾았다”고 전했다. 배씨는 이어 “최근에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퇴직자 간 소통이 활발하다”며 “핑크슬립 파티와 같은 행사가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업황의 등락에 따라 구조조정이 빈번해지면서 퇴직자 중심의 모임은 점차 활발해질 전망이다. 이날 행사장을 찾은 한 기업의 인사 담당자는 “국내 각종 기업에서, 특히 스타트업에서 경영상 이유로 개인의 역량과는 무관하게 구조조정에 나서는 경우가 있다”며 “그 결과 채용 시장에 역량이 뛰어난 퇴직자들이 많이 모여 있어 이들을 찾는 기업들도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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