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박물관장이 아닌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로서 학술적인 논리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이를테면 박물관에서 문외한인 가까운 친구나 조카와 그 아이들에게 전시품을 설명해주듯이, 편안하게 그리고 좀 더 재미있게, 때로는 샛길로 빠지기도 하면서 박물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이난영의 ‘박물관에서 속닥속닥’에서)
‘여성 1호 고고학자’ ‘여성 1호 박물관 학예사’ ‘박물관 역사의 산증인·대모(大母)’ 등으로 불렸지만 스스로는 ‘박물관 할머니’가 되기를 원했던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 8일 별세했다고 국립경주박물관 측이 밝혔다. 향년 90세.
고인은 1934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진주여고와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57년 국립박물관에 촉탁(계약직)으로 발을 들이며 박물관과 인연을 맺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각종 유적 조사와 발굴을 도맡아 하던 시절 그도 현장을 누볐고 ‘무덤 파는 여자’라는 호칭이 붙기도 했다.
고인의 역할은 유적·유물 발굴에서 유물 관리 업무로 바뀌었는데 그의 성격을 알아본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 릿쿄대와 미국 하와이대에서 ‘박물관학’ 과정을 이수했으며 단국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인은 박물관계에서 여성으로서 잇따라 ‘최초’ 기록을 썼다. 1979년에는 여성 최초로 고위직 국가공무원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이 됐으며 1986년 경주박물관장으로 임명돼 ‘여성 1호 국립박물관장’ 타이틀도 달았다.
오늘날 박물관에서 쓰는 소장품 관리 체계의 기틀을 세우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재직 당시 유물 관리 업무를 주로 맡으면서 유형·시대·출토 지역 등에 따라 분류하는 구조를 정립했다. 학계에서 ‘즐문토기’로 부르던 토기 명칭을 ‘빗살무늬토기’로 바꿔 부르게 한 것도 고인이다.
또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서 신라 토우와 동경(銅鏡·구리로 만든 거울) 등을 연구하며 신라인의 삶과 역사를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
그동안 ‘신라의 토우’ ‘한국 고대의 금속공예’ ‘박물관학 입문’ ‘박물관 창고지기’ 등 여러 책을 펴냈으며 2009년 보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국립경주박물관 측은 “박물관학을 전공한 뒤 이를 바탕으로 한 국립박물관 소장품 관리 체계의 기틀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1993년 관장에서 물러난 후에는 2000년까지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은퇴 이후 계속 경주에 머물러온 고인은 국립경주박물관의 유물 이야기를 묶은 책 ‘박물관에서 속닥속닥(진인진)’을 2023년 펴내기도 했다.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태까지 책을 10여 권 썼는데 전부 전문가를 위한 학술 책이었다. 내 생의 마지막 책은 관장이 아닌 유물을 사랑하는 할머니로서 아이들을 위해 쓰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3년 경주박물관장 퇴임사에서 당시 국가적 이슈였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일방적으로 철거하려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 논란이 벌어진 일화도 있다. 이곳저곳을 전전할 유물의 손상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고인이 경주박물관장이던 시절인 1992년 국보인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보호를 위해 타종 행사를 중단했다.
빈소는 경북 경주시 동국대학교경주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0일 오전 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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