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들이 무·저해지 보험의 해지율을 추정할 때 자체적으로 만든 모형을 쓰는 일이 사실상 금지된다. 경영진이 바뀌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당국이 제시한 모델만을 사용할 것을 금융 당국이 강하게 주문했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은 최근 새로운 해지율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보험사가 필요한 경우 예외적으로 자체적으로 만든 모형을 쓸 수 있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은 것이다. 보험 업계는 “불과 며칠 만에 예외 허용을 사실상 금지한 것”이라며 “업계가 대응 가능한 수준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금융감독원은 11일 서울 종로구 손해보험협회에서 이세훈 수석부원장 주재로 열린 ‘주요 보험사 회계법인 경영진 간담회’에서 이 같은 사항을 업계에 전달했다. 간담회는 보험사가 무·저해지 보험 상품의 해지율을 산정할 때 따라야 할 가이드라인을 세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금감원 측은 손보사 경영진이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무·저해지 보험 해지율을 산정하는 자체 모형을 사용하는 것을 지양하고 금융 당국이 고안한 ‘원칙 모형’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체 모델을 써 수익이 크게 늘어난 회사는 ‘요주의 대상’ 목록에 올려 집중 검사하겠다며 당국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따르라는 압박 수위를 한층 높였다. 무·저해지 보험은 계약 기간 중간에 해지했을 때 해지 환급금이 없거나 적은 상품으로 환급금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해지율이 높으면 보험사 순자산이 높아지는 효과를 가져온다. 금융 당국이 제시한 원칙 모형이 아닌 자체 모형 활용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현재 경영진이 실적을 과대평가하는 일을 막기 위해 고안한 원칙 모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당국으로서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부채 평가 모형의 선택은 결국 현 경영진과 미래 경영진 중 누가 이익을 향유하느냐의 문제”라면서 “합리적 선택이 아닌 경영진 실적 유지를 위한 자의적 모형 선택은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원칙 모형이 아닌 자체 모형을 활용할 경우 보험사 대주주와 직접 면담해 시정을 요청할 계획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손보사가 자체 모형을 택한 경우 원칙 모형을 적용했을 때보다 보험계약마진(CSM)이 크다면 집중 검사 대상에 올리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금감원은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도 손보사 자체 모형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체 모형을 사용한 보험사를 검증하다가 사후에 문제가 발생해 재무제표를 수정하면 시장 혼란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수석부원장은 “보험사가 임의로 예외 모형을 적용한 후 감독 당국의 사후 검증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재무제표를 수정하게 되면 시장에 큰 혼선이 발생하게 되는 만큼 시장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예외 모형 선택의 적정성에 대한 사전 검토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앞서 이달 4일 보험사들이 그간 해지율을 지나치게 높게 가정하는 식으로 실적을 부풀렸다고 보고 해지율을 보수적으로 산정하는 원칙 모형을 도입해 이를 사용하도록 했다. 다만 보험사가 필요한 경우 예외적으로 자체적으로 만든 모형을 쓸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제도 도입 취지와 달리 다수 보험사가 자체 모형을 남용해 실적을 포장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자 예외 요건을 보다 구체화하기로 한 것이다.
손보 업계는 금융 당국이 제시한 해지율 관련 가이드라인이 갑작스레 변경돼 당혹스럽다는 입장이다. 해지율을 보수적으로 잡게 한 원칙 모형만을 쓴다면 보험료 추가 인상도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보험 업계의 한 관계자는 “당국이 필요한 경우 예외 모형을 허용한다고 발표한 지 열흘이 채 안 됐는데 이제 와 사실상 전면 금지한다니 혼란스럽다”면서 “당국 지침대로라면 무·저해지 보험의 이익 예상치가 하락하고 자본 건전성 지표 또한 악화하기 때문에 결국 보험료를 상향 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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