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확 붙어야 하는데 잘 타오르지 않는 것 같아요.”
한 전직 고위 경제 관료가 17일 정부가 1년 가까이 상법 개정 방향을 결론 내지 못한 배경으로 정책 동력 상실을 꼽았다. 상법처럼 경제·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무거운’ 법률을 고치려면 모든 관계 부처가 달려들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윤 대통령은 올해 초 한국거래소 개장식에서 “이사회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하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무산됐던 상법 개정안 논의를 재점화한 것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6월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기업 지배구조’ 세미나에서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는 상법 개정을 논의할 시점이 됐다”며 “쪼개기 상장처럼 전체 주주가 아닌 회사나 특정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례가 여전히 빈번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의 상법 개정 주문에도 정부 차원의 논의가 잠잠하자 직접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다. 재계의 반발이 커지자 이 원장은 개인 의견을 전제로 배임죄를 폐지해서라도 상법 개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무 부처가 아닌 금감원에서 상법 개정을 밀어붙이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고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9월 개별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상법 개정과 관련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부처는 없다. 상법 소관 부처인 법무부는 상법 개정에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혔다. 법무부는 최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에게 제출한 ‘상법 개정안 검토 의견서’에서 “이사 충실 의무 확대 조항은 학계와 경제계 등에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며 “관계 부처 및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보다 실용적인 주주 보호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집중 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 선임에 대해서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와 주식시장을 감독하는 금융위원회도 상법 개정에는 신중하다. 밸류업(기업가치 제고)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상법 개정까지는 필요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두 경제 부처는 일반 주주들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방안을 자본시장법에 최대한 담는 쪽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법안은 금융위원회가 낼 예정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부처와 기관별로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