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에서 피부 미용 시술을 하고 암 통증 치료 등을 했다고 속여 실손보험금과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 총 70억 원 가량을 허위로 타낸 보험사기가 적발됐다. 병원과 의사가 실손보험을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는 행위가 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이다. 특히 실손보험 사기를 넘어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까지 노린 범죄가 덜미를 잡힌 것이어서 보다 강력한 단속은 물론 대대적인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금융감독원은 2021년 5월부터 작년까지 환자를 장기 입원시켜 피부 미용 시술을 하고 허위 진료 기록을 통해 실손보험금과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를 타낸 숙박형 요양병원의 조직적 보험사기를 적발했다고 18일 밝혔다. 경찰은 이 보험사기에 가담한 의사, 병원 상담실장, 가짜 환자 등 141명을 검거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경기도 가평의 이 요양병원은 기존에 암 치료 등으로 입원했던 환자 등에게 다시 입원할 것을 권유하면서 “가입된 실손보험에 맞춰 진료 기록을 발급해주고 실제로는 미용 시술을 해주겠다”고 유혹했다. 이후 월 500만~600만 원의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가짜 치료 계획을 설계하고 실제로는 환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 등 다른 사람도 미백, 주름 개선 등 미용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환자들이 보험사로부터 실손보험금 60억 원을 타내 병원비를 내도록 하는 한편 입원비·식사비 등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금액 12억 원을 건보공단에 직접 청구해 부정 수급했다.
환자 136명은 치료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좋은 공기 마시며 요양하고 피부 관리도 하시라”는 유혹에 넘어가 보험사기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1인당 평균 4400만 원의 보험금을 타냈고 10여 명은 1억 원을 넘게 받았다
이같은 방식의 조직적 보험사기 행태는 크게 늘고 있다. 발목이 아파 지인 소개로 서울의 한 성형외과를 찾은 A 씨는 실손보험에 가입했다고 얘기하자 “발목에 염좌가 있어 도수 치료가 필요한데 성형 시술도 같이하면 도수 치료로 영수증 발급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다. A 씨는 200만 원어치 도수 치료와 300만 원짜리 눈코 리프팅 시술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300만 원짜리 도수 치료 영수증을 끊어줘 이를 근거로 실손보험금 300만 원을 청구했다. 결과적으로 A 씨는 성형 시술 비용 중 100만 원을 도수 치료 비용으로 둔갑시켜 실손보험금을 부정하게 챙긴 것이다. 만약 성형외과에서 그런 안내를 받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금감원이 발표한 가평 숙박형 요양병원의 보험사기 역시 규모는 크지만 수법은 비슷했다. 병원이 직접 실손보험 가입자를 유혹해 미용 시술 등을 받게 하고, 암 통증 치료 등을 했다는 가짜 서류를 발급했다. 가짜 환자 각각이 가입한 실손보험이 얼마나 보험금을 탈 수 있는 것인지 상세히 알아보고 최대한의 보험금을 타 내도록 작전을 짰다. 심지어 미용 시술을 쿠폰제처럼 운영하면서 훗날 미용 시술을 받을 때마다 차감하거나 아예 가족 등 남에게 미용시술권을 양도할 수도 있도록 한 것은 병원 측이 작정하고 보험사기를 치려고 했다는 뜻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전국 병의원이 실손보험이 없던 시절에는 굳이 하지 않았던 치료를 과잉 권유하는 것은 이제 누구나 보편적인 일로 받아들일 정도로 만연한 게 현실이다. 여기에 이처럼 실손보험을 노린 조직적인 보험사기까지 종종 벌어지는 것은 ‘실손 빼먹기’가 조직화된 범죄로 진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의료 종사자의 직업 윤리 상실과 실손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 수준에서 이해할 일이 아닌 셈이다.
경찰에 따르면 보험사기 검거 건수는 2022년 1597건에서 지난해 1600건으로 소폭 늘었지만 검거 인원은 4852명에서 6044명으로 24.6%나 폭증했다. 경찰은 매년 보험사기 특별 단속을 실시하고 있다. 올해는 5~6월 2개월간 ‘2024년 상반기 보험사기 특별 단속’을 벌여 636건을 단속해 무려 3219명을 검거했다. 피해금은 273억 5000만 원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보험사기 특별 단속 검거 건수(322건) 및 검거 인원(1500명)과 비교하면 각각 97.5%, 114.6%로 2배가량 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손보험의 손해율과 손실액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보험료로 받은 돈 대비 보험금으로 내준 돈의 비율인 ‘위험손해율’은 2022년 117.2%에서 2023년 118.3%로 증가했고 올해 1분기는 126.1%로 치솟았다. 보험료로 받은 돈을 초과해 보험금으로 내준 돈을 의미하는 ‘위험손실액’은 2022년 2조 원에서 2023년 2조 3000억 원으로 늘었고 올해는 2조 9000억 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매년 갱신되는 실손보험료는 계속해서 오를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4000만 명이 가입한 실손보험이 길을 잃고 추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손보험은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는 급여 의료비 중 본인 부담금과 비급여 치료비를 보장해 공적인 역할도 어느 정도 수행한다. 보험 업계 관계자는 “‘제2의 국민건강보험’으로 불릴 만큼 남녀노소에게 꼭 필요한 실손보험이 지금처럼 일부의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된다면 보험료 인상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실 덩어리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보험 업계 관계자는 “실손보험금을 노린 과잉 진료와 보험사기가 꼭 필요할 때만 병원에 가는 보통 사람들의 실손보험료를 올리고 있다”면서 “4000만 명이 가입한 실손보험이 제 길을 잃은 만큼 개혁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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