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스타트업인 리벨리온과 사피온코리아가 6개월에 걸친 합병 작업을 마무리하고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이번 합병으로 리벨리온은 약 1조 3000억 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국내 첫 AI 반도체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인 비상장기업)으로 등극했다. 앞으로 리벨리온은 주요 주주로 참여하고 있는 SK그룹과의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주력 제품인 신경망처리장치(NPU)를 지속적으로 고도화해 사실상 엔비디아가 독점하고 있는 해외 AI 데이터센터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한다.
리벨리온은 2일 사피온코리아와의 합병 절차를 완료하고 전날 통합 법인 리벨리온이 공식 출범했다고 밝혔다. 사피온코리아가 리벨리온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통합 작업이 이뤄졌으며 합병 후 사명은 리벨리온을 사용한다. 리벨리온을 창업하고 경영해온 박성현 대표가 단독 대표를 맡아 합병 법인을 이끈다. 박 대표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컴퓨터공학 박사를 마치고 인텔과 스페이스X·모건스탠리 등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월스트리트를 모두 경험한 AI·시스템 반도체 전문가다.
리벨리온은 향후 3개월간 인수후통합(PMI) 과정을 통해 조직 통합에 집중할 예정이다. 박 대표는 이날 서울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AI 반도체 시장의 골든타임에 대응하고자 6개월간 집중적으로 준비했다”며 “조직 통합을 잘 마치는 것을 목표로,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을 갖고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에서 성공 신화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리벨리온은 이번 합병을 통해 기존 사피온코리아의 주주였던 SK텔레콤(017670)·SK하이닉스(000660) 등 든든한 전략적투자자(SI)를 확보했다. 엔비디아·AMD·인텔 등 빅테크들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리벨리온은 특히 SK텔레콤과 글로벌 AI 데이터센터 진출을 위해 힘을 모을 계획이다. 이를 통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일본 등 해외시장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리벨리온은 이번 합병을 통해 1조 3000억 원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아 유니콘으로 등극했다. 국내 AI 반도체 기업 중에서는 첫 사례다. 몸집을 대폭 키운 만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사업 협력, 기술 제휴, 추가 자금 조달 등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국내에서도 기업가치와 기술력 등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만큼 AI 반도체 분야의 우수 인재들을 대거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 대표는 “합병을 마무리한 만큼 글로벌 진출을 위한 인재 영입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벨리온은 양 사의 우수한 반도체 전문가들이 한 팀으로 뭉친 만큼 기술 로드맵 달성을 위한 개발 속도도 한층 높여 시너지를 발휘할 계획이다. 리벨리온이 개발 중인 차세대 NPU인 ‘리벨-쿼드’의 대규모 양산에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리벨에 적용된 ‘칩렛’ 기술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빠르게 변화하는 AI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한다. 칩렛은 서로 다른 반도체를 연결하는 차세대 반도체 제조 기술이다.
아울러 AI 분야의 대표적인 오픈소스 머신러닝 라이브러리인 ‘파이토치’ 생태계에서 리더십을 확보해 사용자들이 AI 서비스를 보다 효율적으로 개발하고 구현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박 대표는 “칩렛 기술을 바탕으로 영국 반도체 회사 ARM과 대만의 AI 인프라 제조사인 페가트론 등과 기술적 협력을 진행해오고 있다”며 “향후에도 칩렛과 AI 인프라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갈 글로벌 플레이어들과 협력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합병 법인의 남은 과제는 SK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하는 것이다. 리벨리온이 빠르게 변화하는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협력사 확보와 추가 자금 조달 등을 원활히 추진하려면 SK그룹 계열사로 편입돼 있기보다는 독립 법인으로서 지배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유리하다. 또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를 거치지 않고 연내 합병 작업을 완료하기 위한 전제 조건도 계열 분리였던 만큼 수개월 안에 해당 작업을 완료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공정위로부터 계열 분리를 인정받으려면 SK그룹의 지분율을 30% 이하로 낮추고 이사회 의사 결정 역시 독립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리벨리온이 합병을 완료하면서 퓨리오사AI와 딥엑스 등 국내 AI 반도체 팹리스들의 행보에도 이목이 쏠린다. 이들 모두 AI 반도체 시장 공략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는 만큼 공정한 기술 경쟁을 펼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퓨리오사AI는 차세대 AI 반도체 ‘레니게이드’ 개발을 완료하고 내년부터 시장에 선보일 계획이다. 퓨리오사AI는 레니게이드가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널리 쓰이는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H100’ 대비 높은 전력 사용 대비 성능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만큼 글로벌 시장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리벨리온과 퓨리오사AI가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면 온디바이스 AI 분야의 AI 반도체 시장에는 딥엑스·하이퍼엑셀·모빌린트 등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DX-M1’의 양산을 시작한 딥엑스는 향후 AI 서버의 에지 컴퓨팅을 비롯해 로봇·CCTV·스마트팩토리 등을 공략할 계획이다. 하이퍼엑셀은 대규모언어모델(LLM)에 최적화된 AI 반도체 ‘베르다’를 개발하고 있고, 모빌린트는 내년 양산을 목표로 CCTV·스마트팩토리 등에 특화된 AI 반도체 ‘에리스’를 개발 중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