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정부가 상법 개정에 대응해 자본시장법상 핀셋 규제를 내놓은 건 적용 범위나 대상이 다소 축소되더라도 더 실효적인 대책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상장기업에서 대주주와 일반 주주의 이해 상충이 발생할 수 있는 합병 등 일부 사례만 제대로 막아도 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정부는 자본시장법 안에서도 합병, 영업·자산의 양수도, 주식의 포괄적 교환·이전, 분할·분할합병 등 4가지 분야의 개정에 초점을 맞췄다. 이 부분만 제대로 바꿔도 주주가치 훼손 문제가 대거 시정될 수 있다는 게 금융 당국의 판단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상법 개정을 하게 되면 비상장사 등 102만 개 기업이 영향권에 들어오지만 자본시장법으로 핀셋 규제하면 상장기업 약 2400곳만 적용받는다. 기업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상법 개정안과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법적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상법에서 다루는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는 추상적인 실체적 규정인 만큼 최종적으로 대법원의 판단을 받을 때까지 법적 책임을 따질 수 없어 기업 입장에서 법적 리스크가 길어지고 주주가 입증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다. 반면 자본시장법상 절차적 규정의 경우 이를 지켰는지에 따라 즉각 제재하거나 면책이 가능하기 때문에 예측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이날 자본시장법 개정안에서 특히 눈에 띈 대목은 1997년 이후 한 차례도 고치지 않았던 계열사 간 합병 비율의 가액 산정 기준을 전면 폐지하고 기업 실질가치를 반영하는 공정 가액으로 바꾸기로 한 부분이다.
그동안 합병 비율이 주식 시가에 따라 획일적으로 정해져 투자자 보호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런 만큼 정부는 상장법인이 합병 등을 할 경우 주식가격·자산가치·수익가치 등 다양한 정보를 종합해 고려한 공정 가액으로 산정하도록 했다. 일률적인 산식에서 벗어나 기업의 실질가치를 반영하게끔 한 것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합병 등 가액을 결정할 때 객관성이나 중립성을 높이고 정보 비대칭성을 완화하기 위해 외부 평가 기관에 평가나 공시를 의무화하는 방안도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LG에너지솔루션으로 촉발된 자회사 중복 상장으로 인한 주주가치 훼손 문제도 대책을 내놓았다. 정부는 물적 분할 후 자회사를 상장할 때 공모 신주의 20% 범위 안에서 모회사의 일반 주주에게 우선 배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로 했다. 다만 이는 회사가 주주와 직접 소통하면서 정할 수밖에 없는 만큼 구체적인 기준은 추후 마련하기로 했다.
핀셋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유상증자 등 다른 사례는 현행법으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고려아연은 1주당 89만 원으로 자사주를 공개매수한 후 1주당 67만 원으로 유상증자를 추진했다가 시장 반발에 철회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고려아연은 주주는 물론 회사도 피해를 볼 수 있던 사례”라며 “유상증자를 철회할 때 소액주주 반발도 고려했겠지만 현행법상 우려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자본시장법 개정만으로는 주주 이익 관철이 어렵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세밀하고 구체적인 행동 규범을 마련하면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구상엽 법무부 법무실장은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기 위한 절차 조항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만큼 이를 지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라며 “행동 규범이 나오면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정부의 자본시장법 개선 방향에 대해 환영하면서도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우용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정책부회장은 “주주총회와 이사회 결의 사항만 99개인데 이를 다 규제하겠다는 상법은 기업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라며 “세부적인 논의와 영향을 고민할 필요가 있겠으나 자본시장법 자체는 맞는 방향”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상법 개정 움직임에 대해 과잉 입법의 리스크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저성장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상법에 메스를 대면 소규모 기업과 가족회사 등 102만 개 기업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돼 경제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충실 의무 대상에 주주를 넣는다고 모든 사례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본시장법 개정만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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