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 직후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에서 가상자산 가격이 30~50% 급락하자 해외 투기성 자금이 최소 수천억 원 유입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투자자들이 투매한 가상자산을 외국 자본이 저가 매수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치적 리스크에 대한 국내 가상자산 시장의 취약성이 확인되면서 국내 투자자들이 해외 거래소로 이동하려는 수요가 더 커질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4일 가상자산 정보 사이트 룩온체인은 “한국의 계엄 선언 이후 가상자산 가격이 급락하자 다수의 고래(법인 등 큰손 투자자)들이 저점 매수(bottom fishing)를 목표로 테더(USDT)를 대거 이체했다”며 “계엄 선언 직후 1시간 이내에만 1억 6300만 달러(약 2207억 원)어치가 한국 거래소 업비트로 옮겨졌다”고 전했다.
테더는 미국 달러화에 가치가 연동된 스테이블 코인으로 송금용 수요가 많다. 미국 가상자산 전문매체 코인데스크는 “테더는 주로 가상자산을 사기 위한 목적에 주로 쓰인다”면서 “(업비트로의) 유입은 특가 상품 사냥을 위한 것임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업비트 관계자는 “개별 가상자산에 대한 사항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주요 자산의 거래 차트를 보면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 전날 업비트에서 비트코인은 1억 3000만 원대에 거래되고 있었지만 윤 대통령이 오후 10시 23분 담화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격이 급락해 10시 57분에는 8826만 원으로 뚝 떨어졌다. 이후 빠르게 가격을 회복해 4일 0시 30분께는 이전 가격을 거의 회복했다. 급락 후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인 매수가 이뤄진 영향이다. 리플도 마찬가지다. 전날 3700원대에서 오후 10시 57분 1623원까지 떨어지자 순식간에 매수세가 몰린 후 1시간 30분 뒤에는 이전 가격을 거의 회복했다.
비트코인, 리플 등 주요 가상자산 가격 급락과 급등이 이어지면서 업비트의 거래량은 이날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인게코에 따르면 업비트의 이날 하루 거래량은 292억 달러로 기존 연간 최고였던 11월 13일의 153억 달러의 거의 두 배를 기록했다. 빗썸으로는 어느 정도의 스테이블 코인이 유입됐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빗썸 역시 이날 연간 최대 거래량을 기록한 만큼 업비트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워낙 많은 주문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업비트와 빗썸 모두 비상계엄 발표 이후 1~2시간 동안 거래가 지연되기도 했다.
가상자산 업계에서는 국내 투자자들이 해외 거래소로 이탈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국내 투자자들이 금융 당국의 규제를 받는 국내 거래소에서 가상자산을 거래하게 유도하는 게 정부의 방침”이라면서 “하지만 이번 일로 국내 투자자들이 해외 거래소를 보다 선호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비상계엄 발표와 해제 사건이 최근 가상자산 양도·대여 소득에 대한 과세(22%)를 2년 유예하기로 하면서 좋아졌던 국내 시장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지적했다.
비상계엄 사태로 나타났던 ‘역(逆) 김치 프리미엄(국내 거래소의 가상자산 거래 가격이 해외 거래소보다 싼 상태)’은 평소 수준으로 돌아왔다. 관련 정보 사이트 김프가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45분 현재 비트코인은 0.7~0.8%, 리플은 0.3~0.4%의 역 김치 프리미엄이 형성돼 있다. 이 정도 가격 차이에서는 외국의 투자자들이 국내로 들어오지 않지만 큰 폭의 역 김치 프리미엄이 발생하면 차액을 노리는 즉시 외국 자본이 순식간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된다.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아직 국내 정치 리스크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지 않느냐”면서 “국내외 투자자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는 한편 보다 원활한 거래를 위해 시스템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