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비상계엄 후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시장에서 매입하는 환매조건부채권(RP) 규모가 당초 예측을 뛰어넘는 하루 10조 8000억여 원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은은 1차로 2주간 RP 매입으로 유동성을 공급한 뒤 상황에 따라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통화 당국이 대규모 자금을 풀어 시장 경색을 푸는 것은 맞지만 계엄 선포에 따른 경제적 대가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금융계에 따르면 한은은 전날 오후 2시께 10조 8100억 원 규모의 RP 매입을 실시했다. 이번 지원은 14일간 이뤄진다. 한은은 매일 RP 매매를 통해 유동성을 공급하는데 누적 규모만 151조 3400억 원에 달한다. 최종 규모는 상황에 따라 더 커질 수도 있다. 사실상 ‘무제한’ 유동성 공급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번 RP 매입은 전체 규모로 따지면 코로나19 이후 최대다. 2022년 강원도 레고랜드 관련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 불이행 사태 당시 한은이 매입한 RP보다 많다. 한은의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위기 대응의 목적에서는 이번 결정이 (단일 회차 기준) 역대 최대”라며 “RP 대상 기관을 모든 금융사로 확대한 것도 처음”이라고 전했다.
한은은 4일 임시 금융통화위원회를 소집해 RP 매매 대상을 일부 은행과 증권사에서 모든 금융사(44곳)로 늘린 바 있다. 이남강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경기 침체를 일으키는 여러 경로들이 있지만 단기자금 시장부터 경색되기 시작하면 빠르게 경기가 얼어붙기 때문에 한은이 속도를 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은의 적극적인 움직임은 계엄 사태가 투자자들에게 미칠 영향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날 추가 금리 인하에 대해 “선제적 금리 인하는 경제 전망이 바뀌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새로운 정보가 없기 때문에 경제 전망을 바꿀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이번 계엄 사태에 대한 해외의 충격이 더 큰 것 같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에서는 정치 상황을 계속 봐왔기 때문에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이라도 하는데 해외에서는 정말 쇼크가 온 것”이라며 “제 전화기, e메일로 정말 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질문이 왔다”고 덧붙였다.
S&P글로벌의 예측도 비슷하다. S&P글로벌은 “한국에 대한 투자심리가 정상화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며 “경제·금융·재정 신용 지표가 받은 충격의 강도가 명확해지기까지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내다봤다.
한은은 원·달러 환율도 당분간 변동성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은은 이날 트럼프 2기의 강력한 대중 관세정책 등 무역 갈등 심화로 중국 경제가 부정적 영향을 받으면서 위안·달러 환율이 큰 폭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원화가 위안화에 연동되는 경향이 큰 만큼 향후 원화의 힘이 더 약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총재는 “계엄 사태가 당연히 부정적 뉴스이기 때문에 환율이 1410원으로 오른 상태지만 이후 새 쇼크가 없다면 천천히 다시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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