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하루 만에 주요 시중은행에서 1조 2600억 원 규모의 달러·엔화 예금이 이탈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적 불확실성에 환율이 급등하면서 기업과 개인이 외화 자금을 대거 인출했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도 외화 자금 시장 변동성이 커질 수 있는 만큼 은행권에 면밀한 대응을 요구했다.
5일 금융권에 따르면 비상계엄 사태 직후인 4일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달러 예금 잔액은 약 85조 7394억 원(605억 5900만 달러)으로 전날(86조 6667억 원, 612억 1400만 달러) 대비 약 9273억 4900만 원(6억 5500만 달러) 감소했다. 비상계엄 사태 하루 전인 이달 3일에는 달러 예금이 전일보다 523억 8460만 원(3700만 달러) 늘었지만 하루 만에 1조 원가량의 달러 자금이 이탈한 것이다.
엔화 예금 잔액도 하루 새 급격히 줄어들었다. 4일 5대 은행의 엔화 예금 잔액은 9조 5978억 원(1조 195억 엔)으로 전날(9조 9322억 원, 1조 548억 엔) 대비 약 3324억 원(353억 엔) 쪼그라들었다. 전일 감소 폭(1214억 7000만 원, 129억 엔)보다 2.7배나 확대된 규모다.
달러·엔화 예금이 급감한 것은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원·달러 환율이 1440원대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계엄령 여파로 정치적인 불안 요인이 있는 상황인데 환율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자 개인·기업 고객들이 환전에 나섰다”며 “특히 달러의 경우 개인 고객보다 기업 고객의 자금 이탈이 훨씬 컸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그동안 달러와 엔 등 외화 자금을 보유하던 투자자들이 매도 타이밍이라고 판단하는 모습”이라며 “외화 예금이 빠져나가는 동시에 ‘대기성 자금’인 원화 요구불예금 잔액이 유의미하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은 은행권에 비상계엄 여파에 따른 외화 자금시장 혼란에 대비한 컨티전시플랜(상황별 대응 계획) 마련을 요청할 방침이다. 외화 자금 시장이 경색됐을 때를 대비해 시나리오별로 대응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또 은행 외화 자금 조달 추이를 일별로 들여다보는 등 모니터링도 강화한다. 특히 만기를 적절히 분산하고 만기가 된 자금을 문제없이 롤오버(만기 연장)하고 있는지 등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금감원은 이외에도
외국은행 국내 지점의 전문가들을 만나 외화 자금 리스크에 대한 의견도 수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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