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표결로 이어지는 비상 정국 동안 투자 대기성 자금에 해당하는 은행 요구불예금 잔액이 12조 원 이상 불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발(發) 불확실성 확대에 갈 곳을 잃은 자금이 일단 은행 계좌로 모여든 것으로 분석된다. 시중은행 재테크 전문가들은 국내 주식보다는 미국 주식이나 채권 비중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9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이달 6일 기준 요구불예금(MMDA 포함) 잔액은 612조 4099억 원으로,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당일인 3일(600조 2615억 원) 대비 12조 1484억 원 증가했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인 4일에는 하루 만에 잔액이 8조 원 이상 늘어난 608조 3150억 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요구불예금 급증세는 최근 세 달에 걸쳐 약 15조 원 감소해왔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실제 5대 은행의 지난달 요구불예금 잔액은 608조 2330억 원으로 10월 말(613조 3937억 원)보다 5조 1607억 원 감소했다. 지난주 요구불예금이 돌연 늘어난 것은 계엄과 탄핵 불발 등으로 이어진 정국 혼란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환차익 금액이 일시적으로 반영됐고 가상자산 시장이 요동치며 ‘패닉셀’로 은행권 대기 자금으로 돈이 몰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요구불예금이 늘었다는 것은 금융시장 불확실성이 커지며 투자자들이 새로운 투자처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전했다.
정치 리스크 장기화 전망에 금융소비자들의 재테크 셈법도 복잡해지고 있다. 윤 대통령이 계엄을 선언한 직후 원·달러는 1~2시간 만에 40원 넘게 급등하며 1446.5원까지 치솟는 등 외횐시장 불안이 높아졌다. 가상자산 시장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계엄령 전 업비트 기준 1억 3000만 원대에서 거래되던 비트코인은 후 8800만 원대까지 일시적으로 떨어졌다가 이내 가격을 회복하기도 했다.
재테크 전문가들은 불안정한 시기에 미국 주식과 채권 투자를 권하고 있다. 김도아 우리은행 TCE시그니처센터 팀장은 “꾸준히 상승 흐름을 보이는 미국 주식은 사실상 안전자산이기 때문에 포트폴리오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이어 “미국 장기국채나 투자등급채권 역시 크게 수익을 내기는 힘들어도 금리 인하기에 엇박자가 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 10년물 국채금리가 현재 4~4.1% 수준인데 이 정도면 채권에 들어가기에는 부담스럽지 않는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박윤정 신한프리미어 PWM도곡센터 팀장은 “현재 고객들에게 미국 ETF나 국채 상품을 추천하고 있다”며 “금리가 천천히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국채를 매수할 경우 지금보다 내년에 수익률이 더 좋을 것”이라고 전했다.
달러와 엔화에 대해서는 분할 매도를 추천하고 있다. 정성진 KB국민은행 강남스타 PB센터 부센터장은 “불안에 따른 심리적 요인 영향으로 달러를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고객들이 있지만 지금 달러 매수를 추천하지는 않는다”며 “원·달러 환율은 현재 거의 고점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분할 매도를 고려할 타이밍”이라고 말했다. 엔화와 관련해서는 “계엄령 여파로 엔화도 940원까지 올랐다”며 “과거 엔화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차익 실현을 검토할 시기가 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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