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야당 간사인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일 국회 본회의 개의 직전 기자들과 만나 “여당 및 정부와의 예산안 최종 협상이 결렬됐지만 삭감안은 정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민생과 경제를 위험하게 만드는 예산이 아니다. 그런 (민생·경제) 예산은 다 살려뒀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4조 1000억 원을 감액해 단독으로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킨 2025년도 예산안은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당장 3주 뒤인 내년 1월 1일부터 국민 치안과 민생, 산업 전 영역에서 예산 부족에 따른 공백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방적 감액만 이뤄진 예산의 부작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독단적 행태라는 비판과 함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거대 야당이 민생을 볼모로 잡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정부는 부족한 예산을 보충하기 위해 결국 내년 초 추가경정예산을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검·경찰의 치안 유지 및 각종 범죄 수사다. 마약·보이스피싱·주가조작·치안활동에 쓰이는 검·경찰의 특수활동비 및 특정업무경비 총 618억 6600만 원이 전액 삭감됐기 때문이다. 전액 삭감된 예산에는 인권 보호와 같은 검찰 업무 지원 특활·특경비 50억 2100만 원, 마약 수사 특활·특경비 21억 3500만 원, 딥페이크·인공지능(AI)을 활용한 첨단 범죄 및 디지털 수사 특활·특경비 1억 9800만 원 등이 포함됐다.
검경뿐만 아니라 공공기관·공기업 등을 감시하는 감사원의 특활·특경비 총 60억 3800만 원도 전액 삭감됐다. 허 의원은 “‘깜깜이’로 쓰이는 특활비와 특경비를 삭감했다”고 설명했지만 마찬가지로 깜깜이인 국회 특활·특경비 약 195억 원은 전액 유지됐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수사기관의 특활비와 특경비는 비밀스러운 수사에 쓰이는 돈인데, 이 지출을 모두 자르는 것은 그 기능을 상실시키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정부 예비비도 정부안 4조 8000억 원에서 2조 4000억 원으로 반토막 났다. 특히 이 감액안에는 폭설·폭우 등 재해가 발생했을 때 투입되는 목적 예비비도 1조 원 포함돼 있다. 당장 1월부터 대규모 폭설이 발생하면 이에 대응할 여력이 부족해지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일반 예산으로 편성했어야 할 5세 및 고교 무상교육은 예비비로 쓸 수 있도록 했다. 국고채 이자 상환을 위한 예산은 5000억 원 줄었다. 이외 △전공의 지원 예산 931억 원 △기초연금 급여 예산 500억 원 △청년도약계좌 지원 예산 280억 원 △대학생 근로장학금 지원 예산 83억 3200만 원 △취약 계층 아동 자산 형성 지원 예산 21억 4800만 원 등 민생 예산도 줄줄이 삭감됐다.
국가 경제를 뒷받침할 주요 산업들도 윤석열 정부에서 추진됐다는 이유로 줄줄이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체코 원자력발전소 수출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 정부가 내년 신규 사업으로 편성한 ‘민관 합작 선진 원자로 수출 기반 구축 연구개발(R&D)’ 예산은 70억 원 중 63억 원이 삭감됐다.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을 위한 출자 예산 505억 5700만 원은 8억 3700만 원으로 줄었다. 한미·한일 등 양자 경제 진흥을 위해 편성한 ‘재외공관 경제외교 현장실습원 파견’ 예산 11억 6700만 원도 전액 삭감됐다.
각종 민생, 경제 예산이 복원되거나 증액되지 않은 채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막판까지 여야가 ‘이재명표 예산’인 지역사랑상품권 발행 예산을 두고 합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은 이날 본회의 개의 직전 민주당에 지역사랑상품권 발행 예산을 올해 수준인 3000억 원으로 증액하자고 제안했으나 민주당은 이 규모를 1조 원으로 늘리자고 요구하면서 막판 협상이 결렬됐다.
4조 1000억 원 규모의 감액안이 내년도 예산으로 확정되면서 내년 초 추경은 불가피해졌다. 야당이 예산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면서 법정 의무 지출 이외 감액된 예산에 대해 기금 운용 계획을 함부로 바꿀 수 없도록 부대 의견도 달았기 때문이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조기 대선으로 정권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추경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물론 그 전에라도 추경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경 전까지 발생할 공백에 대해 거대 야당이 무책임한 행태를 보였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추경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당장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라며 “증액이나 복원 없이 감액만 반영됐기 때문에 추경 가능성이 높아진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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