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만 하더라도 한우 티본스테이크를 생산하거나 팔 수 없었다. 규제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소의 부위를 10개로 구분하고 여기에 맞춰 소고기를 유통하도록 했다. 등심과 안심(채끝)은 10개 부위에 포함되지만 두 부위가 함께 있는 티본스테이크는 혼합 부위라는 이유로 한우로는 생산·판매할 수 없고 수입산만 팔 수 있었다. 단순한 부위 구분이 생산을 좌우하는 경계가 돼버린 것이다. 애꿎은 소비자들이 한우 티본스테이크를 맛본 건 관련 규제가 없어진 2015년 이후부터다.
이처럼 경계를 나눠 관리하는 건 산업사회의 특징 중 하나다. 삼권분립 등 정부 구조에서부터 산업 분류, 교육·의료 체계, 직무 분류 등 우리가 아는 분류와 구분은 거의 대부분 산업사회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경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극명하게 갈렸다. 공간도 예외는 아니다. 용도에 따라 지역을 나눠 세밀하게 규제했다. 이런 경계의 힘은 대단해서 토지의 용도만 바꿔도 큰돈이 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이를테면 도시의 경우 주거·상업·공업·녹지로 지역을 나누고, 주거 지역의 경우에도 전용·일반·준주거지역으로 구분하는 식이다. 전용주거지역도 단독주택을 지을 수 있는 1종과 공동주택(아파트)을 건립할 수 있는 2종으로 나뉜다. 1종에서 2종으로 종 상향이 이뤄지면 땅값이 크게 오르게 된다.
산업사회가 만든 경계 중에는 자격 제도도 있다. 특정한 일을 특정 요건을 갖춘 사람만 하도록 한 것이다. 자격 제도는 순기능도 크지만 시대 변화를 따르지 못하거나 기득권이 돼 사회 발전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 통계를 보면 1950년대 초만 해도 자격을 요하는 직업이 5%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29%에 이른다고 한다. 자격 제도 때문에 미국의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분석이 계속 나오는 지경이다.
경계는 안에서 보면 보호막이지만 밖에서 보면 장벽이다. 티본스테이크의 사례처럼 경계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못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최근의 혁신 사례들은 이런 경계를 없애는 일에서 출발한다. 학문 분야에서 불고 있는 통섭 바람에서부터 기업 간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공통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플랫폼 경제까지 그 모습도 다양하다. 현재 한국이 새로운 정부 혁신 전략으로 추진하는 디지털플랫폼정부도 정부 안에 존재하는 사일로, 즉 장벽을 없애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한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될수록 경계의 부작용은 더 커진다. 특히 과거의 기술 패러다임에서 만들어진 사회 시스템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면 AI의 혁신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기업과 정부가 AI 조직으로 거듭나는 출발점은 내·외부의 불합리한 경계를 걷어내고 혁신에 제한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러 사회적으로는 기득권을 보호하는 경계들도 개선해야 한다. 특정한 일을 특정 사람만 하도록 계속 묶어둔다면 AI의 혜택이 사회 전체로 확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AI 시대에 불필요한 경계가 새로 만들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허용되는 AI 서비스를 미리 정하고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경우 활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티본스테이크형’ AI 규제는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언제든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