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초반의 하버드대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 남성이 미국 뉴저지주 이스트오렌지시에 있는 한 의류 브랜드 물류 창고로 들어선다. 패션 감각과는 거리가 멀어 이제 막 ‘샤크바이트(원시시대 포식자가 한쪽을 뜯어 먹은 것처럼 생긴 원피스)’, 마릴린 먼로가 즐겨 입던 스타일의 ‘마릴린 원피스'를 공부하듯 익히고 구분하기 시작한 그에게 창고 한 구석에 가득 쌓인 캐미솔(블라우스 안에 받쳐 입는 민소매 속옷)이 눈에 들어온다. 저렴하게 대량 구입한 캐미솔은 그에게 ‘자산’이 아닌 ‘악성 부채’였다. 그는 파산 직전에 이른 이 회사의 문제는 매출이 아니고 재고라고 봤다. 경영진은 손익계산서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대차대조표 문제는 정작 생각하지 못한 곳에 있었다.
플러스 사이즈의 흑인 여성 전문 의류 브랜드 ‘애슐리스튜어트’의 신임 대표를 맡은 이는 사모펀드 투자자인 제임스 리. 애슐리스튜어트의 주 고객은 중하위 소득층의 흑인 여성이었고 직원들 역시 고객들의 특성과 다르지 않았다. 미국 하버드대, 하버드대 로스쿨을 거쳐 사모펀드 세계에서 13년 간 활약해 온 제임스 리의 활동 반경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배우자인 메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백인이었다. 언뜻 결말이 흔히 상상되는 첫 만남이다. 사모펀드 소유주로서 ‘임시 대표’로 회사 운영에 나선 뒤 수익성을 만든 뒤 바로 높은 가치에 다른 회사에 매각하는 형태가 될 것이었고 이 모든 일은 6개월 이내에 이뤄질 터였다.
한국계 미국인 제임스 리의 회고록인 ‘레드 헬리콥터’는 이처럼 ‘다름’의 상황들을 어떤 가치로 극복하는지 그 여정을 담았다. ‘무엇을’의 세계에 있던 사모펀드 투자자가 ‘어떻게’의 세계에 집중하게 된 이유를 탐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보통 사모펀드 투자자와 인수 기업이 형성하는 관계와 달리 이 둘 간의 관계는 첫 단추부터 조금은 달랐다.
손익계산서상 수치들을 언급하는 온갖 대화가 될 것을 예상했던 직원들 사이에 다른 반응이 나왔다. 제임스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이었다. “저는 누구도 패닉에 빠지길 원치 않아요. 저는 다정함과 수학을 회사의 중심에 두면 우리가 함께 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리 역시 자신에게서 나온 ‘다정함’이라는 말에 놀랐다. 이후 그는 이 다정함이라는 말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파고들었다. 동시에 자신이 왜 사모펀드 투자자로서의 성공에도 무언가 허전함을 느껴 회생 불가능한 애슐리스튜어트에 와서 숙식을 하면서 현장 지휘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를 쭉 파고 들어가던 그가 따라 간 마음의 기억의 끝에는 어릴 적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빨간색 헬리콥터’ 장난감에 있었다. 어릴 적 공립학교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점심 도시락을 챙겨오지 못한 친구를 위해 제임스 리는 자신의 도시락을 나눠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왔다. 손에 빨간색 헬리콥터 장난감을 쥔 채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제임스 리의 섬세한 배려와 친절에 대해 감사함을 시간과 마음을 써서 표현했고 이는 그에게 다정함으로 남았다. 그 당시 이민자로서 어려운 삶을 살던 아버지가 그 빨간 헬리콥터의 사연을 듣고 그가 하버드대에 합격했을 때보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기억한다.
국내에서 출판되는 책들 중에 한국계 미국인 기업인의 이야기는 그 활약 무대가 미국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주목받기도 한다. 정작 내용을 살펴보면 과대평가됐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책들도 있다. 이 책은 언뜻 비슷한 인상을 주지만 무엇보다도 현장감이 느껴지는 상황과 상세한 서술, 몰입되는 전개에 매끄러운 번역까지 더해져 제임스 리가 살아온 이민자의 삶과 이후 애슐리스튜어트에서의 행보에 빠져들게 한다. 동시에 실행 과제가 남는다. 다정함이란 무엇인가. 지금부터 어린 존재들의 미래에 강력한 자산이 될 다정함의 행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450쪽. 2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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