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면서 국내 기업들도 탄핵 정국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갔다. 내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새로운 임기가 시작되면서 글로벌 공급망 다툼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기업들은 사실상 기능이 멈춘 우리 정부의 보호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윤 대통령의 비상 계엄령으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등 재무 상황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까지 겹치면서 기업들은 내년 초부터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게 됐다.
레거시 HBM 주력인 中 수출길 막은 미국…삼성 겨냥했나
반도체 업계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전날(2일·현지 시간) 미 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발표한 반도체 수출 규제를 주목하고 있다. 미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은 반도체 수출통제 개정안을 발표하고 중국을 비롯한 ‘무기 금수국’에 내년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출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메모리 대역폭이 ㎟(제곱밀리미터)당 초당 2GB(기가바이트)를 넘는 HBM이 대상이다. 사실상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HBM을 중국으로 수출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HBM은 고성능 인공지능(AI) 전용 칩에 함께 탑재되는 D램이다. 시장점유율을 보면 SK하이닉스가 1위, 삼성전자가 2위,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3위다. 이 규제는 당장 삼성전자를 겨냥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중국 AI 반도체 회사들이 주로 구매하는 구형 HBM인 3세대 HBM(HBM2) 시장에서 9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전체 HBM 매출에서 중국 매출은 20% 안팎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형 HBM 시장에서 매출을 만들어 HBM3E 등 최첨단 HBM 시장에서 1위 자존심을 회복해야 하는 삼성전자는 미국 규제로 인해 중요한 매출원을 잃을 가능성이 커졌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중국 D램 업체들이 HBM2 양산까지 시작한 가운데, 미국 규제로 수출길이 더욱 좁아져 삼성전자의 HBM 사업은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 같다”고 말했다.
中 최대 D램 회사는 손대지 않은 미국
미 정부 제재의 중요한 특징은 중국 최대 규모의 D램 업체인 창신메모리(CXMT)를 제재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미국이 CXMT를 리스트에서 뺀 것은 압도적 선두인 한국 회사들의 투자를 견제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CXMT는 D램 제품 중에서 용량이 낮은 8Gb(기가비트) 칩 등 레거시 품목에서 D램 생태계를 흔들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CXMT는 올 2분기에 3억 3474만 개의 8Gb D램을 생산했다. 지난해 2분기 생산량인 1억 3982만 개보다 2.3배나 늘어난 수치다. 이 칩은 16Gb 등 고용량 D램에 비해서 수익은 낮은 편이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는 여전히 현금 창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캐시카우’ 제품이다.
미국은 세계 D램 시장에서 공급과잉을 주도하고 있는 CXMT를 활용해 자국 회사인 마이크론의 라이벌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현금 창출을 막고 선행 반도체 투자를 견제하겠다는 전략을 깔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의 ‘범용 장악→미래 칩 투자’ 공식 깨질 수도
한국 업체들은 세계 D램 시장에서 7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레거시 시장에서 특유의 가격경쟁력과 생산능력을 바탕으로 큰 매출을 낸 뒤 이 돈을 선단 공정에 투자하는 전략으로 숱한 라이벌 회사들을 꺾었다.
그러나 이번 미국의 제재로 이 공식이 깨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레거시 시장에서 한국 D램 업체에 대한 견제를 지속하고 자국 우선주의를 기반으로 마이크론에 대규모 지원금을 지급한다면 한국의 메모리 위기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경기 불황으로 적극적인 투자에 나설 수 있는 여력이 부족해지고 있어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도 문제다. 삼성전자는 2분기에 보유 현금이 100조 원대를 회복했지만 지속적인 주가 하락 등으로 지난해 2분기부터 올 1분기까지 90조 원대를 기록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대통령의 계엄령 이후 정부의 기능은 '올스톱'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부와 국회에서 공론화된 반도체 특별법에 대한 논의 역시 탄핵 정국 이후 원점으로 돌아간 분위기다.
이 법안에는 반도체 업계의 발목을 잡고 있던 낡은 법안에 대한 개선책이 담겨 있었다. 연구개발(R&D)가 핵심인 반도체 산업만은 주 52시간 근무제도에서 예외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고, 여태까지는 '0원'이었던 반도체 보조금을 생태계 곳곳에 지원하는 내용까지 포함됐다. 법안대로 대통령 직속의 반도체산업특별위원회가 설치되면 그간 반도체 회사들이 답답함을 느꼈던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 규제 해소에 대한 이야기도 가속화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을 경우 내년 열릴 ‘트럼프 2.0’ 시대에 맞춰 다양한 반도체 이슈를 조금이라도 더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었을 가능성도 크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 반도체 규제로 세상이 떠들썩한 날 반도체 계엄령을 해도 모자랄 판에 한밤의 정치적 계엄령으로 모든 논의가 초기화됐다"고 설명했다.
조 단위 해외투자 했던 배터리·항공 업계…환율 급등에 ‘비명’
탄핵 정국 여파로 원·달러 환율이 급등(원화 가치 하락)한 것 역시 기업들에게 큰 위기요인이다. 특히 외화부채가 많아 환율 상승 리스크가 큰 기업들 중심으로 재무건전성에 충격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0일 재계와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비금융기업(기업)의 대외 채무는 1662억 1200만 달러(약 232조 원)에 이른다.
재계에서는 조 단위 해외투자가 많았던 배터리 업계와 항공기 리스 등에 달러를 써야 하는 항공 업계를 중심으로 올해도 외화부채가 상당히 증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LG에너지솔루션의 3분기 기준 외화부채는 9조 5987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항공의 외화 차입금도 14조 6986억 원에 이른다. 2020년 인텔 낸드사업부 매입(90억 달러)에 뭉칫돈을 쓴 SK하이닉스는 올 들어 그룹 차원의 ‘리밸런싱’ 작업을 통해 차입금을 수조 원가량 줄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외화부채가 25조 998억 원에 이른다. SK그룹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 발생 이튿날인 4일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주재로 사장단 긴급 회의를 소집해 환율 급등이 회사 재무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기도 했다. SK는 SK하이닉스를 비롯해 SK이노베이션·SK온 등이 상당한 외화부채를 보유하고 있어 환율 상승에 가장 민감한 기업 중 하나로 분류된다.
국내 기업들은 고환율이 장기화될 경우 재무 건전성은 물론 실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단기적으로 선물환 계약 등 외환 헤지 방파제를 통해 충격에 버틸 수 있지만 사태가 길어지면 손실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원·달러 환율이 10% 뛸 경우 세전 이익이 2388억 원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그나마 올해는 무역수지가 흑자를 나타냈지만 내년부터 또다시 적자로 돌아서면 달러 가뭄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기업이 원자재를 사기 위해서는 달러가 필요한데 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달러 가치가 올라 환율이 오르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원·달러 환율이 1400원 선을 넘기는 것 자체가 이미 위기 상황”이라며 “외화 표시 부채에 대한 이자와 원금 상환 부담이 모두 늘면 정상적인 투자와 고용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환율 상승이 수출기업에 유리하다는 상식도 점차 무너지고 있다. 과거에는 환율이 오르면 우리 제조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개선돼 수출이 늘어난다는 게 상식으로 통했지만 최근에는 글로벌 공급망 체계가 복잡해지고 있어 환율과 수출의 인과 관계가 약해졌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여기에 환율 상승이 글로벌 신인도 하락으로 이어져 각종 무역금융 등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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