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 자유무엽협정(FTA) 재협상이 대미 통상의 핵심 이슈가 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정부가 대책 수립에 나섰다.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 취임(1월 20일) 직후에 대미 통상 전략을 발표할 예정으로 알려져 통상 대응 전략에 관심이 쏠린다.
26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산업통상자원부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 이후 디지털 시장 개방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해 이에 대한 내부 준비에 돌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통상 압박에 대한 대응 수단으로 산업부는 내년 1월 기재부, 외교부 등 관계부처와 합동으로 대미 통상 전략을 발표할 예정인 것으로 확인됐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디지털 시장 개방을 바이든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요구하며 한미 FTA 재개정을 촉구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분석된다. 빅테크 기업 등 자국 시장 보호를 최우선에 두고 있는 트럼프가 ‘국경 간 데이터 이동 보장’ 등을 요구하며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최근 2기 행정부의 무역·관세정책을 총괄할 무역 및 제조업 선임고문에 피터 나바로 전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 국장을 내정했다. 나바로 고문은 트럼프 1기 당시 미중 무역 전쟁을 사실상 진두지휘하는 한편 한미 FTA 폐기를 주장하며 한국을 상대로 재협상 전략을 설계한 바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나바로 고문과 관련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한미 FTA 같은 불공정한 무역 협정을 재협상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치켜세웠다. 디지털 시장 개방은 트럼프 행정부의 실권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진다. 테슬라는 인공지능(AI)과 디지털 프로그램을 접목한 시스템을 앞세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 중이며 글로벌 시장 선점을 노리고 있다.
미국 정부가 디지털 시장 개방을 압박하는 이유는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선도 기업의 승자 독식이 가능해 막대한 이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디지털 공급자 위주의 생태계가 잘 갖춰진 만큼 한국 등 아시아 소비 시장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크다. 통상 전문가들은 이에 국내 핵심 정보통신(IT) 기업이 미국 주요 업체와 인공지능(AI) 기술 공동 개발 등 협력을 통해 디지털 공급 시장에 적극 참여하도록 정책적 지원을 마련해놓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소비자 보호에 민감한 유럽연합(EU) 등과 디지털 규범 마련에 선도적으로 나서 시장 조성에 주도적 참여자가 돼야 한다고 평가한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개정과 관련해 가장 핵심이 될 조항은 디지털 무역 챕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미 FTA에서 디지털 무역 챕터가 최신화돼 있지 않아 미국이 개정을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구글·아마존 등 미국의 빅테크 플랫폼은 해외시장 진출을 촉진하기 위해서 보다 개방된 형태의 디지털 무역 규범을 주요 협정국에 요구하고 있다.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에서는 강화된 형태의 디지털 무역 규범이 포함됐는데 한미 FTA 디지털 챕터는 그 같은 규범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경 간 데이터 이동 보장 등이 의무 조항이 아닌 노력 조항으로 들어가 있고 개인정보 보호, 컴퓨팅 설비의 지역화 요구 금지, 소스코드 공개 요구 금지, 인터랙티브 컴퓨터 서비스 조항 등이 한미 FTA 협정문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때문에 향후 미국이 한미 FTA 재개정을 요구할 경우 FTA 디지털 무역 챕터 최신화가 최대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조 바이든 행정부에서 한미 정상회담 때마다 한국 정부에 디지털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며 “현행 한미 FTA는 전자적으로 전송되는 디지털 제품에 대해서 무관세와 비차별 대우를 규정하고 있지만 시장 접근과 규제 등은 미래 유보 사항으로 지정돼 시장 개방 정도가 높지 않다”고 설명했다.
통상 전문가들은 이에 미국의 디지털 무역 챕터 최신화 요구가 거세질 것으로 내다봤다. 허윤 통상정책자문위원장(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은 “미국은 디지털 관련 플랫폼 기업들을 포함해 자국의 경쟁력 있는 빅테크 기업들이 많아 자유로운 데이터 이동을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자국 산업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트럼프 행정부는 바이든 대통령보다 더 강력하게 디지털 시장 개방을 요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디지털 시장의 완전 개방이 이뤄질 경우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빅테크 플랫폼이 받을 충격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디지털 시장이 승자 독식 특성을 지닌 만큼 최상위 사업자만 살아남는 상황이 나타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허 교수는 “AI 시장 규모만 봐도 미국은 1위인데 한국은 6위로 간극이 크다”며 “한국의 데이터 생산량도 미국에 비하면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데이터센터 인프라도 턱없이 부족해 시장이 열리면 국내 기업들은 종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압박에 대비해 한국이 디지털 규범 구축에 선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소비자 보호에 방점을 둔 EU 등과 함께 공동 규범을 마련해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응해야 한다고 평가한다. 이시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EU 같은 경우에는 소비자 보호나 개인정보 보호에 쏠려 있어 디지털 시장이 발전하기가 힘든 측면이 있다”며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자세를 취하면 우리 빅테크 기업 성장에 유리하지 않아 균형을 잘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재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국제통상법에서 국내 규제라는 원칙과 규정이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면서 “우리 정부가 지리 정보 같은 데이터 접근은 국가 안보랑 관련된 사안이라서 접근을 제한하고 있는 점 등을 미국과 잘 협의하면 최소한의 방어 논리가 형성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기업이 미국 빅테크 플랫폼과 AI 공동 투자·개발 등에 참여하도록 사전 준비를 해놓아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허 교수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의 비즈니스 모델 확대 전략 등을 살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테슬라는 자율주행 프로그램을 정착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해외에 판매하려 한다”며 “향후 디지털과 AI가 접목된 데이터 시장이 빠르게 커질 수 있기 때문에 한국도 미래 생태계에 진입해 중요한 파트너로 자리를 잡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내의 한 플랫폼 업계 관계자 역시 “미국과 한국의 AI 등 기술 격차는 상당한 편인데 데이터 시장을 완전 개방하면 국내 기업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며 “미국 주요 기업과 협업 관계를 강화해 한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후 데이터 시장의 완전 개방을 추구하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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