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반도체 게임의 법칙을 바꾸고 있다. 이전까지는 모든 것을 혼자 해내는 ‘독립독행(獨立獨行)’이 왕좌의 조건이었다. 이제는 기업 간 역량을 모으는 합종연횡이 대세다. 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TSMC와 삼각동맹으로 AI 반도체 패권을 쥐었다. 반면 오랜 기간 왕좌에 군림했던 인텔과 삼성전자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두 기업 모두 독립독행으로 일군 종합반도체 기업(IDM)이다.
게임의 법칙은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이라는 정치적 변수로 인해 한층 더 복잡해졌다. 시장의 합종연횡을 이끌고 정치적 압박까지 이겨내기 위해서는 ‘트럼프 카드(Trump Card)’가 필요하다. 카드 게임에서 유래한 용어로 결정적 우위를 제공하는 비장의 무기를 뜻한다. 반도체 게임의 트럼프 카드는 다름 아닌 초격차 기술이다.
강력한 기술적 해자를 확보하려면 세분화된 지원책이 필요하다. 분야별 특성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촌각을 다투며 발전하는 AI 반도체 기술과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소재·부품·장비 기술은 호흡이 다르다.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라도 수심 깊은 곳의 유속은 느린 것과 같다. 분야별 강점을 취하는 합종연횡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세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팹리스(Fabless) 분야는 산업 도메인 역량을 기반으로 빠르게 우위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 틈새시장이라도 좋다. 우리가 주도하는 영역을 만들고 확장하자. 가령 미국이 선점한 서버 기반의 클라우드 AI와 달리 디바이스 기반의 엣지 AI는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 가전·모바일·자동차·로봇 등 디바이스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온디바이스 AI 반도체 등 핵심기술을 조기 확보하고 트랙 레코드를 쌓자. AI 반도체는 속도전인 만큼 필요시 외부 역량을 빌려서라도 빠르게 전략적 우위를 점해야 한다.
둘째, 메모리 분야에서는 판을 바꾸는 과감한 기술적 시도를 장려해야 한다. 프로세싱인메모리(PIM)·뉴로모픽 등 메모리 중심 아키텍처는 AI 반도체 역학 구도를 바꿀 수 있다. 여기에는 공정·하드웨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스템 전반의 큰 그림을 설계하는 새로운 역량이 필요하다. 정부가 대학·연구기관의 연구개발(R&D)·인력·인프라 지원으로 마중물을 붓고 기업은 산학연 협력으로 선행 기술과 인재를 확보하는 선순환 체계를 만들자.
셋째, 소부장 분야는 긴 호흡으로 원천기술 축적을 도와야 한다. 반도체 공정 경쟁력을 좌우하는 소부장은 미래 승부처인 첨단 패키징에서도 핵심 역할을 한다. 최근 글로벌 기업들이 소부장 강국 일본으로 모여드는 이유다. 우리도 지난 5년간 지원을 늘렸지만 깊고 단단한 퇴적층을 쌓기 위해서는 거점기관 중심으로 원천기술을 중단 없이 축적할 수 있는 장기·대형 R&D 사업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차세대 반도체에 대한 기초 투자를 늘려야 한다. 화합물반도체가 대표적이다. 에너지·통신 등 특정 영역에서 실리콘을 대체할 화합물반도체는 가치사슬 전 영역에 걸쳐 새로운 기술과 인프라를 요한다. 따라서 초기 투자가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 앞에 시급한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정치적 혼란이 우리 반도체 산업을 멈춰 세워서는 안 된다. 여야가 초당적 지원을 약속해온 만큼 관심과 지원은 계속돼야 한다. ‘반도체 코리아’는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국가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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