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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식탁에서 오간 대화가 셰플러를 바꿔놓았다

위대한 시즌 속엔 참담한 좌절도

“네 안의 목소리를 더 키워라”

오랜 친구 조언 뒤 우승 봇물

셰플러 뒤엔 ‘셰플러의 사람들’

지금, 당신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코스 내 웨이스트 벙커 구역을 걷는 스코티 셰플러. AFP연합뉴스




산 만한 덩치(191㎝)와 축 처진 눈매, 덥수룩하지만 오히려 순한 이미지를 부각하는 수염까지. 스코티 셰플러(28·미국)는 누가 봐도 순둥순둥한 모범생 골퍼다. ‘화려한 성적에 비해 캐릭터가 약하다’는 일각의 평가도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순한 외모와 반대로 맹수 서열 최상위권인 불곰처럼 셰플러도 불같은 면이 있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가 최근 공개한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스코티 24’에는 셰플러의 ‘화끈한’ 화풀이 장면이 담겨있다.

2월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 때의 일이다. 셰플러는 퍼트 실패에 퍼터를 내팽개치는가 하면 홀을 이동하면서 골프볼을 사람이 없는 숲 쪽으로 냅다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의 캐디 테드 스콧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못 본 척 땅을 보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이 대회에서 셰플러는 티샷부터 그린 전까지의 수치는 전체 2위였다. 하지만 퍼트는 그의 기준에 ‘꽝’이었다. 최종 순위는 공동 10위로 나쁘지 않은 위치였지만 셰플러는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투어에서 비길 데 없는 볼 스트라이킹을 자랑하는 셰플러는 그러나 퍼트에 있어선 특별한 선수가 아니었다. 이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올해 퍼트 고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린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상 이상이었다. AFP연합뉴스


첫 대회부터 그랬다. 1월 더 센트리. 타이거 우즈 이후로 2년 연속 올해의 선수에 뽑힌 첫 사례라는 타이틀을 등에 지고 출발한 셰플러다. 2022~2023시즌 23개 대회에서 2승을 올렸고 톱25에 들지 못한 대회는 단 2개였다. 2024시즌의 첫 대회도 36홀 선두였다. 하지만 3·4라운드에 그린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공동 5위로 마쳐야 했다.

“사람들 기대에 부응해야 한단 생각에 너무 지배 당했어요. ‘너무 잘 치고 있어’ ‘매주 우승하는 거 아냐’ 이런 말들요. 그래서 안 풀리면 더 크게 실망했나 봐요.”

2월 AT&T 페블비치 프로암도 2라운드까지 공동 선두였으나 마지막 3라운드(악천후로 54홀로 축소) 때 퍼트 난조에 발목 잡히면서 공동 6위로 마감했다. 이어진 피닉스 오픈 때는 3라운드 마지막 홀 퍼트를 그린을 넘겨 벙커까지 보내는 실수가 나왔다. 버디가 보기가 됐다. 백 나인에서 나온 쇼트 퍼트 미스만 3개. 공동 3위 성적에도 셰플러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상태로 제네시스 대회에 나선 거였다. 계속되는 퍼트 악몽에 셰플러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앞선 시즌 말미에 세계 최고의 퍼팅 코치 중 한 명인 필 케니언으로부터 도움을 받기 시작했는데도 결정적인 순간 말을 듣지 않는 퍼트는 잘 고쳐지지 않고 있었다.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퍼포먼스는 나오지 않았어요. 그럴 때가 가장 힘든 법이죠.”

스스로는 바닥에서 허우적대는데 사람들은 순항하고 있다며 격려하고 웃어주니 셰플러는 참담할 지경이었다. 다행인 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주변인들이 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셰플러는 마음껏 실전 연습을 할 홈코스에 체육관, 즐겨 먹는 치폴레 매장, 출석하는 교회까지 모두 댈러스의 집으로부터 지척에 두고 있다. 몇 마일 안에 다 있다. ‘좋은 사람들’도 늘 함께다. 고교 때의 첫사랑 메러디스가 아내이고 스윙 코치 랜디 스미스는 일곱 살 때부터 스승이다. 성경공부 모임에서 만난 캐디 스콧은 캐디 이상의 존재다.

우승 뒤 가족들과 찍은 기념 사진. AFP연합뉴스


브래드 페인도 셰플러의 사람들 중 한 명이다. 페퍼다인대에서 골프를 했던 페인은 현재는 PGA 투어 상임목사다. 셰플러와는 오랜 친구. 그의 캐디를 맡은 적도 있고 셰플러 가족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제네시스 대회 때 셰플러는 조촐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페인과 마주했다. 이 자리에서 “괜찮은 거냐”는 친구이자 멘토의 한마디가 버튼 역할을 했다. 셰플러는 퍼트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낱낱이 털어놓으면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페인은 셰플러가 좀 더 단순하고 용감해지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어디로 도망칠 생각인 건데? 숨을 곳이 없잖아. 네 주변에서 들리는 목소리들보다 네가 더 큰 목소리를 가지면 좋겠어. 그게 크리스천으로서 너의 정체성이기도 하고.”

듣기 편한 위로와는 거리가 먼 페인의 말들에 셰플러는 정신이 확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일종의 리셋을 했던 걸로 기억해요. '내가 골프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지? 그냥 나가서 경쟁하는 걸 즐기는 거잖아’.”

다른 이들의 기대에 끌려 다니는 대신 자기가 사랑하는 경쟁 그 자체를 감사해 하는 셰플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보면 그는 현재만 직시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멘탈 훈련을 통해 여러가지 생각들을 칼같이 구분 짓는 법을 터득한 그였다. 지금 머무르는 바로 이곳, 현재에만 집중하는 습관이 배어있었다. PGA 투어라는 최고 중의 최고 무대에서 기대만큼 잘해내는 과정 속에 자기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였고 그 더미에 잠깐 열쇠를 빠뜨렸던 것이다.

파리 올림픽 시상식에서 감상에 젖었다. 로이터연합뉴스


셰플러의 슬럼프 아닌 슬럼프는 제네시스 바로 다음 출전 대회인 3월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부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음의 방향을 살짝 틀었을 뿐인데 배운 대로, 연습한 대로 퍼트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승-우승-공동 2위-우승-우승. 제5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과 메이저 중의 메이저 마스터스를 포함해 한 달여 사이에 4승을 쓸어 담은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수렁을 더 깊이 파는 것처럼 역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실마리는 찾아오는 모양이다. 아주 평범했던 식사 자리가 위대한 시즌의 출발이 됐다.

그 후로 마냥 순탄했던 건 아니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땐 목 부상으로 힘들었고 마스터스 1라운드 뒤엔 코스를 떠나면서 “이런 스윙으론 남은 3일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파리 올림픽 최종 라운드 백 나인에 들어서면서는 “퍼터를 부숴버릴까”라고 캐디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셰플러도 스트레스와 좌절에 면역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그 식탁에서 다시 중심을 잡았던 셰플러는 이후 때로 아파하고 불평할지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파리 올림픽 마지막 날 셰플러는 후반 9홀에서 버디 6개를 잡고 역전 우승했다.

어릴 적 ‘PGA 투어 선수가 되려면 어딜 가든 투어 선수처럼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골프복 차림으로 등교하곤 했던 셰플러는 요즘도 훈련 때 초심자용 그립으로 연습한다. 손가락 모양대로 홈이 난 연습 보조기구다. 뭘 하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라 카드 게임을 하면 이길 때까지 “한판 더”를 외쳐 같이 치던 사람들을 질리게 한단다. 다음날 오전 티오프일 때도.

새해도 힘찬 티샷. AFP연합뉴스


이렇게 승리에 대한 열망과 경쟁에 대한 순수한 애정 사이에서 균형을 잃는가 싶을 때도 있다. 마스터스 최종 라운드를 앞두고 친구들에게 “우승에 너무 간절해지는 게 좀 싫다”고 털어놓았던 셰플러다. 그런 그에게는 우승하든 컷 탈락하든 있는 그대로의 셰플러로 품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페인은 “부모님과 캐디, 아내, 코치가 셰플러를 바로 세운다. 그는 우승을 늘 바라는 선수지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우승에서 찾으려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했다.

투어 7승 등 주요 대회 9승으로 ‘24년’을 자신의 숫자로 만든 셰플러는 새해 여섯 번째 시즌에 나선다. 투어 통산 13승이니 20승을 새해에 채울 수도 있겠다. 아니면 투어 데뷔 후 우승 없이 70개 대회를 보내던 그 시기를 다시 겪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셰플러의 사람들은 변함없이 셰플러를 지지하지 않을까.

지금 당신 곁을 지키는 당신의 사람들은 누구인가. 동시에 당신은 누군가가 언제든 안길 수 있는 넉넉한 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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