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합병 등 자본 거래 과정에서 증권신고서를 수차례 반려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외부평가기관 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금감원이 합병비율 등을 검증하는 역할을 떠맡은 형국이다.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관심이 커진 만큼 합병비율 산정 과정에서 일반주주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일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30일 코스닥 상장사 소룩스가 비상장사인 아리바이오를 인수하기 위해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대한 5차 정정을 요구했다. 지난해 8월 19일 증권신고서가 처음 제출된 이후 8월 27일(1차), 9월 11일(2차), 11월 6일(3차), 12월 3일(4차), 12월 30일(5차)까지 정정 요구가 지속되고 있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기구 업체인 소룩스는 알츠하이머 치료제 AR1001의 글로벌 임상 3상을 진행 중인 아리바이오 흡수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아리바이오 대주주가 세 차례에 걸쳐 기술특례 방식으로 코스닥 상장을 추진했다가 실패하고 자신의 지분을 넘기는 형태로 소룩스 최대주주가 된 이후 아리바이오 인수를 추진하자 우회 상장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다만 회사 측은 우회 상장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금감원은 정정 요구 사안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회사가 공시하는 증권신고서가 아닌 다른 창구로 정보가 공개되면 시장 혼란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회사 측엔 비상장사인 아리바이오의 가치 산정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 등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통상적으로 비상장사는 미래 가치 등을 기준으로 합병가액을 산정하는데 여기에 자의적인 요소가 포함되는 사례가 많아 금감원이 자세히 살펴보는 경우가 있다.
금감원에선 합병비율은 정정 요구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기업 가치 평가 기준을 바꾸면 합병비율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금감원 정정 요구가 반복되면서 소룩스와 아리바이오 합병 비율도 거듭 조정됐다. 실제 지난해 8월 최초 증권신고서 제출 당시 1대 2.50이었던 합병비율은 11월 1대 2.40으로 소폭 조정됐다가 12월 4차 정정에 이르자 1대 1.85까지 낮아졌다. 이마저도 5차 정정 요구가 나오면서 합병비율이 더 낮아지거나 무산될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합병비율이 1대 2.50에서 1.85까지 조정되는 동안 외부평가기관은 외부평가업무 수행기준에 따랐으며 모두 적정하다는 의견을 첨부했다. 즉, 금감원이 사실상 합병비율을 검증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금감원 관계자는 “금감원은 합병비율 수정을 요구하지 않는다”며 “소룩스·아리바이오 합병 건에 대해 여러 차례 정정을 요구한 것은 합병법인 중 대형 계약건의 실재성 등 투자 판단에 필요한 사항을 회사가 제대로 소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금감원의 잇단 정정 요구에 따라 기업이 눈치껏 합병비율을 고치는 식의 절차가 반복되자 이 과정에서 합병 등 일정이 지연될 뿐만 아니라 주가도 영향을 받고 있다. 일각에선 차라리 금감원이 원하는 합병비율을 먼저 제시하라는 불만마저 터져 나온다.
문제는 금감원을 제외하면 이 같은 역할을 할 기관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정부는 합병 등 자본 거래 과정에서 주주 이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이사회가 합병 가액 적정성 등에 대한 의견서를 작성·공시하고, 모든 합병에 대해 외부평가기관에 의한 평가·공시를 의무화하는 등 자본시장법 개정 필요성을 언급한 상태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회계법인 등 외부평가기관이 합병비율을 객관적으로 검증해야 하지만 회사와 계약 관계 등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금감원이 최소한의 역할만 할 수 있도록 시장 정화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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