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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족쇄’에 성장한계…시스템개혁 필요하다

계엄·줄탄핵 'P리스크' 최대치

저성장에 트럼프 스톰 등 불안

정치 후퇴에 기업과 경제발목

지난해 12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주도로 마은혁·정계선·조한창 헌법재판소 재판관 선출안이 통과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마커스 갈로스커스 인도태평양 디렉터가 한국의 비상계엄과 탄핵 국면에 대해 “이번 정치 위기는 2025년에 한국과 미국, 한미일 간의 고위급 전략 조율과 동맹의 핵심 이슈에 대한 논의를 어렵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이달 20일(현지 시간) 취임해도 한국은 ‘권한대행의 대행’만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촉발된 외교·안보 공백은 경제와 민생으로 뻗어나간다. 계엄 사태 이후 원·달러 환율은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인 1480원대까지 치솟았다. 외국인들은 지난해 12월 한 달간 국채 선물을 16조 원어치나 팔아 치웠다. 올해 1%대 성장이 예고된 상황에서 고환율과 금융시장 불안, 다가오는 ‘트럼프 스톰’은 한국 경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대한민국이 ‘정치 족쇄’로 인해 성장 한계에 봉착했다. 정치의 회복과 구조 개혁, 시스템 변화 없이는 더 이상 경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커질 수도 없다는 것이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제는 정치와 사회, 문화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며 “반도체는 국가 대항전이 펼쳐지는 사생결단의 상황인데 (정치권이) 주 52시간 문제도 처리하지 못한다.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으면서 경제정책과 기업의 혁신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헤리티지재단의 경제자유도지수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의 ‘세금(Tax burden)’ 항목 점수는 73.7로 일본(68.5), 미국(65.3)보다 높았다. 하지만 지난해는 59로 미국(74.8), 일본(63.3)에 비해 크게 낮다. 해당 지수는 세율을 고려하는데 덴마크 같은 복지국가가 바닥권이다.

국회의 법안 처리 속도 역시 감소했다. 법안 처리율은 △18대 54.7% △19대 44.9% △20대 37.9% △21대 36.7% 등이었다. 지난해 야당발 탄핵소추안이 18번, 대통령의 재의 요구가 31번이다. 정치 실종은 첨단산업 경쟁력 약화로 직결된다. 미국은 2022년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이 발효된 지 2년여 만에, 일본은 보조금 검토 소식이 처음 알려진 지 1년 만에 보조금을 제공했다.



정책도 기업도 '韓 특유의 속도' 상실…정치복원이 반전 첫 단추

- [신년기획-미래를 위한 정치 정상화] <1> 퇴행의 혹독한 대가

- 美·日 반도체 보조금 속도전 속

- 韓, 여야 이견에 논의 시작 못해

- PF·석화 등 구조조정도 하세월

- 계엄 이후 입법시계 사실상 멈춰



- 트럼프2기 대응 준비 전혀 안돼

- 정치가 경제 발목 악순환 끊어야

미국 상무부가 지난해 9월 23일 폴라반도체에 1억 2300만 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확정했다.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제정된 ‘반도체지원법(칩스법)’에서 규정한 보조금을 지원한 첫 사례다. 칩스법이 발효된 후 지원이 확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 1개월이다.

반도체 부활을 선언한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집행 속도는 더욱 빠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 보조금 검토 계획이 알려진 뒤 정책 집행까지 1년 1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앞서 일본은 2021년 말 반도체 생산보조금을 법제화한 것과 동시에 4760억 엔의 보조금을 앞세워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보조금은 정치에 가로막힌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극명히 보여준다. 반도체 인프라 지원과 특별회계 설치 등의 내용이 담긴 반도체특별법만 해도 ‘주 52시간 예외 규정’에 대한 여야 이견으로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보조금 논의는 시작도 못 했다.

산업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은 지난해 1월 ‘미래산업 혁신 발전 추진에 관한 실시 의견’을 발표했다. 이후 2027년까지 첨단기술에 대한 재정 투자 확대와 특별 기금 마련 등을 정부 주도로 펴나가겠다고 공언했다. 미중 디커플링(탈동조화)을 염두에 둔 조치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 이후도 대비할 수 있는 정책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난해 10월, 영국은 ‘투자 2035:영국의 현대적 산업 전략’을 내놓았다. 영국판 산업 대계다. 반면 한국은 트럼프 2기 출범이 코앞인데도 제대로 된 산업·통상 정책조차 공개하지 못한 상태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석유화학 구조조정 또한 하세월이다. 그 사이 3차원(3D) 프린팅과 차세대 항공 기술 수준은 중국에 역전됐고 지능형 로봇과 웨어러블디바이스 등은 중국의 가시권에 있다. 그만큼 한국의 정책 속도가 느리다는 얘기다.

이는 정치의 실종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현 정부의 두 번째 여소야대 국면이 펼쳐졌던 22대 국회 1년 차에는 여야의 극심한 대립 속에 거야의 입법 독주와 대통령의 재의 요구가 되풀이됐다. 특검법안 발의는 15차례,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는 31차례 이뤄졌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를 포함해 야당발 탄핵소추안도 18차례 발의됐다. 22대 국회 개원 후 국회가 격주로 탄핵안과 특검법을 발의한 셈이다.

특히 22대 국회의 법안 처리 실적은 최악이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에는 입법 시계가 사실상 멈췄다. 지난해 말까지 처리된 법안이 912건에 불과하다. 21대 국회에서 같은 기간에 1408건을 기록한 것과 대비된다. 특히 지난해 예산 정국에서는 헌정 사상 초유의 ‘감액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해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양자 등 첨단산업 지원책이 물거품이 됐다. 첨단산업 전력 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한 각종 지원책이 담긴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원자력발전소 가동으로 발생하는 사용후핵연료(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 시설을 건설하는 내용의 ‘고준위 방폐물 관리 특별법’은 여야 모두 발의했으나 상임위원회에 계류된 채 지난해 처리가 무산됐다. 극단적인 정치 갈등이 경제와 기업에 직격탄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의 추격과 미국 우선주의, 정치권의 뒷다리 잡기에 사면초가다. 국내 대표 반도체 업체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우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판매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삼성은 HBM 부진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과거에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선제적으로 공장을 짓고 최신 설비를 들여와 수율을 높이면서 시장을 장악했다”며 “적시에 정부의 지원이 부족한 영향도 있겠지만 지금은 TSMC나 인텔 등의 투자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도 “노동시장 개혁과 법인세 인하 등은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직결된 사안으로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정치가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해석했다.

전문가들은 정치 회복을 통한 경제 살리기가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20일 취임 첫날부터 이민과 보편관세 등 주요 정책들을 쏟아낼 가능성이 높다. 국내 기업에 영향을 주는 칩스법과 인플에이션감축법(IRA)의 재검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현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서는 사실상 제대로 된 대응이 어려운 만큼 정치권의 협조가 절실하다. 이필상 서울대 특임교수는 “정치가 싸움판이 되더라도 최소한 경제만큼은 국익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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