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퇴직연금 제도를 시작한 지 19년 만에 처음으로 실물이전 서비스를 도입한 것은 사업자 간 건전한 경쟁을 촉발해 수익률 개선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퇴직연금 계좌를 다른 금융사로 옮기려면 기존 상품의 해지에 따른 비용, 펀드 환매 후 재매수 과정에서 손실이 발생할 수 있어 번거로운 데다 무엇보다 ‘퇴직연금=원금 보장’이라는 인식에 근로자나 이를 운용하는 금융사 모두 수익률 제고에 대한 니즈가 약했다는 판단이다. 실제 전체 퇴직연금 중 원금 보장형 상품은 80% 이상에 이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굴려 수익률을 높이는 사례가 증가하자 실적 배당형 상품에 특화된 증권사로 갈아타려는 수요가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퇴직연금 적립금 증가율은 이를 잘 보여준다. 6일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은행·증권·보험 등 42개 퇴직연금 사업자가 굴리는 퇴직연금 총적립금은 400조 1000억 원(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2023년 말 대비 5.8% 증가했다. 이 중 증권사의 적립금 증가율은 11.3%(86조 7000억 원→96조 5000억 원)로 은행(6.2%, 198조 원→210조 3000억 원) 및 보험사(0.1%, 93조 2000억 원→ 93조 3000억 원)를 압도했다.
증권사의 적립금은 지난해 2분기 처음으로 보험사를 추월한 후 3분기 들어 더 격차를 벌리고 있다. 10년 전인 2014년만 해도 보험사 적립금이 증권사의 2배에 달했지만 10년 새 위험자산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커진 셈이다.
업계에서는 실물이전 서비스가 시작된 지난해 10월 말 이후에는 이 같은 추세가 더 뚜렷해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증권사 중 퇴직연금 규모가 가장 큰 미래에셋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적립금은 29조 1946억 원으로 전년 대비 22.9% 증가했다. 2022년, 2023년 적립금 증가율이 각각 15.0%, 21.5%인 점을 감안하면 해마다 적립금이 불어나고 있다. 특히 지난해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와 코스피지수의 수익률 격차가 33.47%포인트까지 벌어지면서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수익률이 극명하게 갈리는 상황이다. 이는 실적 배당형 상품 등 투자 상품 포트폴리오→퇴직연금 수익률 등에 대한 연쇄적인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증권사의 경쟁력이 확연해진다. 퇴직연금 수익률은 증권이 7.11%(2023년 기준)로 가장 높고 은행(4.87%), 손해보험(4.63%) 순이다. 지난해에는 격차가 더 커졌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주요 증권사들의 확정기여(DC)형 원금 비보장 퇴직연금 상품의 최근 1년 수익률은 13% 내외로 두 자릿수를 넘어선 반면 일부 손해보험사는 같은 기간 6%대 수익률에 그쳤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전체 연금 가입자 10명 중 4명이 연 환산 10%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고 설명했다. 국내 대기업에 근무하는 한 직장인은 “예전에는 본인의 퇴직연금 계좌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방치하는 직장인들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직접 상장지수펀드(ETF) 등으로 해외에 투자하는 동료들이 늘고 있다”며 “이제는 퇴직연금 계좌를 자유롭게 갈아탈 수 있어 회사별로 수익률이 어떤지 살펴보고 갈아탈까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금융투자 업계는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가 지난해 말 시작된 만큼 올해를 신규 연금 가입자를 유치할 호기로 보고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매년 9.4% 증가해 2033년에는 지금의 2.4배인 94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증시 하락으로 증권사의 핵심 수입원인 국내 브로커리지(위탁 매매) 수수료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가입 기간이 긴 연금 고객은 확실한 추가 수익원이 될 수 있다. 올해 주요 증권사들이 신년사에서 ‘연금’과 ‘글로벌 자산관리’를 최우선 목표로 세운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증권사들은 이미 조직 개편을 완료하고 연금 고객 유치에 나섰다. 미래에셋증권은 기존 연금1·2부문을 연금RM1~3부문으로 확대하고 퇴직연금 현물이전을 타깃으로 삼는 연금혁신부문을 신설했다. 한국투자증권 역시 퇴직연금 관련 조직을 1개에서 3개 본부(퇴직연금1·2본부, 퇴직연금운영본부)로 확대 개편했다. 삼성증권은 기존 자산관리 부문에 속했던 연금본부를 디지털 부문으로 이관했다. 개인이 직접 가입할 수 있는 퇴직연금(DC·IRP) 규모가 증가하면서 젊은 직장인들에게 효과적인 디지털 마케팅이 그만큼 중요해진 데 따른 조치다. KB증권 또한 연금 영업 기능과 비대면 연금 자산관리 대응 강화를 위해 연금자산관리센터를 신설했고 현대차증권의 경우 리테일본부 산하에 연금사업실을 새로 만들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퇴직연금 자금 유치 경쟁의 핵심은 수익률”이라며 “증권사들이 실적 배당형 상품을 앞세워 은행과의 적립금 격차를 줄여나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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