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남산의 부장들' 우민호 감독이 현 시국에 들어맞는 신작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독립운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앞다퉈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인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바탕으로 탄생된 이 작품은 13일 기준 누적 관객 수 400만 명을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정상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주제의 묵직함에 비해 연기력, 스토리 흐름 등 다양한 이유로 호불호가 갈리고 있는 모양새다.
◇하얼빈 의거는 '묵직'...스토리 흐름은 '불호' 왜? = '하얼빈'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현빈)이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암살하는 거사를 치르기 위해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최재형(유재명), 이창섭(이동욱) 등 열사들과 힘을 합치는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하얼빈 의거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그들의 동선을 비추며 동시에 열사 개개인의 인간적인 고뇌를 조명한다.
하얼빈 의거의 상황은 현 시국과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다. 국가에 위기가 닥칠 때 멍청한 정치인들에 비해 조선의 국민들은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는 취지의 이토 히로부미의 발언처럼 현재의 대한민국이 처한 사태를 겨냥하는 발언들이 맞물려 관객들의 발걸음을 극장가로 향하게 만든다.
하지만 메인 검색 포털 리뷰들에서 스토리 흐름을 불호로 받아들이는 관객 또한 다소 나타나는 추세다. 작품의 메인 빌런은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안중근이 초반부에 만국공법에 따라 살려준 전쟁 포로인 모리 다쓰오(박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안중근의 '고결한' 신념으로 인해 모리 다쓰오는 살았지만 그렇게 목숨을 부지한 결과, 앙심을 품은 그의 공격으로 독립군은 더 많은 동지를 잃게 된다.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도 하얼빈 의거는 차곡차곡 준비되나 안중근을 향해 던지는 "한낱 감상주의에 빠져서 일을 그르쳤다"는 독립군의 비난처럼 계속되는 안중근의 아집 섞인 선택과 이상주의만 묻어나는 대사에 관객들의 한숨은 커져간다. 애초에 처음부터 모리 다쓰오를 죽였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비극이 너무 많다. 출연진들의 반 이상이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웅을 인간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좋으나 그 면이 공감을 자아내지 않을 경우 발생하는 '불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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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호 감성'은 인정하나...영상미만 내세운 신들은 '글쎄' = '하얼빈'은 그간 쌓아온 우민호 감독의 단단한 연출 고집이 느껴지는 신들이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전작 '남산의 부장들'의 후반 부분에서 "중정으로 갈까요? 육본으로 갈까요?"라는 말과 함께 김규평(이병헌)이 차를 돌리는 장면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성공하며 "까레아 우라"를 외치는 장면과 오버랩된다. 역사가 바뀌는 순간을 철저히 제3자의 입장으로,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늘 위에서 지켜보는 듯한 앵글은 단순하지만 명확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우민호 감독의 시그니처 명장면에도 불구하고 영화 중반쯤 늘어지는 전개는 지적할 수밖에 없다. 몽골, 라트비아를 오가는 해외 촬영을 감수하며 탄생시킨 장면들은 경탄을 자아내나 스토리 없이 영상미만을 내세운, 영화가 아닌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중간에 등장하는 밀정을 추적하는 스토리 또한 늘어져 긴장감이 떨어지고 대충 밀정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는 흐름에 클리셰에 대한 지적 또한 나올 수밖에 없다.
◇묵직하지 못한 현빈의 안중근 '아쉬워'...이외 배우들 연기는 빛나 =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연기에 있다. '하얼빈'은 화려한 캐스팅 라인업으로도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현빈, 이동욱, 조우진, 박정민, 전여빈에 특별 출연 정우성까지. 적어도 기본은 하는 배우들이 모여 만들어낸 작품이기에 전반적으로 연기 구멍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빈의 깊이에 '안중근 의사'의 무게는 살짝 버거워 보인다. 아무리 우리가 흔히 아는 안중근 의사와 외형이 다를지라도 이입 불가의 이유는 연기력에 있다. '남산의 부장들' 속 김규평을 연기한 이병헌 정도의 묵직한 대사 소화력이 필요한 배역이나 극 초반부터 현빈의 존재감은 난감하다 못해 안타깝다. ‘얼어붙은 두만강’이라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어온 사람이라는 설정이 무색할 표현만을 보여준다. 더불어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단지동맹’을 맺는 장면에서도 현빈이 표현한 대한민국의 독립을 갈망하는 열사의 소신은 미약하게만 다가온다.
'하얼빈' 관람 묘미 중 하나는 일본인들과 격돌하는 액션신이지만 그 액션 신마저도 오히려 이창섭 역의 이동욱이 현빈보다도 눈에 띈다. 전작 '킬러들의 쇼핑몰'에서 다져진 액션 실력 덕분일까. 두꺼운 칼을 들고 일본군들을 썰어내리며 진격하는 그의 액션은 타겟을 향한 포커스가 명확하고 굉장한 타격감까지 선사한다.
더불어 '하얼빈'의 명장면 중 최고를 꼽는다면 주연 현빈이 아닌 김상현 역을 맡은 조우진의 연기다. 모리 다쓰오가 마치 짐승에게 먹이듯 던져주는 스테이크를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걱우걱 씹어 먹는 장면은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보여줘야 했던, 역사의 본질이 담긴 명장면이다. 많은 ‘불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만큼은 '호'로 쳐줘야 한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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