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해 기업형 장기 민간임대주택을 도입했다. 박근혜 정부의 ‘뉴스테이’ 정책을 발전시켜 민간임대주택 시장을 키우려는 의도다. 자율형과 준자율형·지원형 등 기업형 임대주택 모델을 세분화하고 그에 따라 취득·종합부동산·법인세 중과 배제 등 세제 혜택을 주거나 임대료 규제를 완화해준다는 게 골자다.
정부는 개인 대신 기업이 ‘집주인’이 돼 주택을 관리하면 주택 공급량도 늘릴 수 있는 데다 세입자가 원할 경우 거주 기간을 장기화해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등 다양한 장점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사회적 문제가 된 전세사기 우려가 비교적 적어 정부는 2035년까지 기업형 장기 민간임대주택을 10만 가구 공급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자금을 오래 묵혀둘 수 있는 보험사가 장기임대주택 시장에 뛰어들 수 있도록 장기임대주택 보유 시 지급여력비율을 25%에서 20%로 낮추기로 했다.
하지만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나 국내 자산운용사·은행·보험사 등 금융권은 선뜻 투자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다. 월세 비중이 늘면서 국내 임대주택 시장의 투자 매력이 충분히 커졌음에도 정치·사회적으로 ‘부동산 투기꾼 프레임’이 씌워질까 두려운 까닭이다.
선례도 있다. 2020년 국내 대표 토종 대체투자 운용사인 이지스자산운용이 겪은 고초가 대표적이다. 당시 이지스자산운용은 서울 삼성동에 나 홀로 아파트 삼성월드타워를 통째로 매입한 후 리모델링해 분양에 나설 계획이었다. 시장에서는 “신선한 시도”라는 평가가 나왔고 실제 다수의 기관투자가도 확보했다.
하지만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금융과 부동산의 로맨스가 일어나고야 말았다”며 “펀드 가입자들이 다주택 규제를 피해 임대 수익과 매각 차익을 나눠 가질 수 있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저격하며 상황이 급변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적법하게 투자했다”고 해명했지만 결국 추 장관이 검찰 수사까지 지시하고 나서자 발표 나흘 만에 투자 계획을 철회하고 아파트를 산 가격에 다시 통매각했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임원은 “당시 이지스자산운용의 사업 모델은 임대주택은 아니고 분양을 목표로 했다”며 “다만 국내 투자자들에게 부동산 정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만든 트라우마와 같은 사건으로, 지금 기업형 장기 임대주택에 소극적인 모습에는 당시 에피소드의 영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박근혜 정부 때 도입된 뉴스테이 정책이 문재인 정부에서 축소됐다가 다시 윤석열 정부에서 기업형 장기 민간임대주택으로 확대되는 일련의 과정도 정책 지속성에 대한 의문을 키웠다”고 덧붙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임대주택 시장은 해외 자본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전세에서 월세로 임대 시장이 급격히 전환되면서 글로벌 투자가들은 한국 시장을 매력적인 투자처로 보고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임대주택’이라고 하면 통상 ‘서민을 위한 상품’이라거나 ‘저렴하고 가성비 좋다’는 인식이 대세지만 최근에는 고소득 1~2인 가구를 노린 소형 고급 주택이 해외 자금을 통해 자리 잡는 상황이다. 실제 부동산 개발 업체인 미국의 하인스는 서울 신촌에 ‘고품질 관리 서비스’를 내세운 1~2인 가구 대상 임대주택을 계획 중이다. 모건스탠리는 금천과 성북, 길동 등에 소규모 고급 임대주택을 공급한다. KKR은 양평과 회기에, M&G리얼에스테이트는 강남과 명동 등 ‘알짜’ 부지를 확보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추진한 기업형 장기 민간임대주택 정책이 탄핵 정국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시장 신뢰를 되찾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폐지 등은 힘을 잃고 있다. 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국민연금도 정치적 프레임이나 정책 지속성을 우려해 해외로 눈을 돌린 것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다른 관계자는 “해외 업체들이 수익 확보를 위해 임대료를 크게 올릴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토종 자본의 민간임대시장 진출은 주거 안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측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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