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하는 탄핵 정국과 경기 둔화 우려 등 대내외적인 불안 요소에도 불구하고 연초 회사채 시장이 발행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1분기 금리 인하를 기정사실화한 시장 참여자들의 회사채 수요가 높은 데다 기관투자가들이 자금 집행을 재개하는 ‘연초 효과’까지 맞물리면서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들도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형국이다.
17일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LG화학(051910)(신용등급 AA+)은 3000억 원어치 회사채 발행을 위한 수요예측을 진행해 총 1조 6750억 원의 매수 주문을 받았다. 3년물(모집액 1500억 원)에 1조 2650억 원, 5년물(1000억 원)에 3100억 원, 7년물(500억 원)에 1000억 원의 자금이 들어왔다.
LG화학은 희망금리 범위로 민평금리(민간 채권평가사가 평가한 기업의 고유금리)에 -30~30bp(1bp=0.01%포인트)를 가산해 제시했는데 △3년물 -7bp △5년물 7bp △7년물 0bp에 유효 수요를 채웠다. 전 거래일 기준 3년물 민평금리는 연 3.073%로 기준금리(연 3%)보다 약 7bp 높았음에도 시장이 평가하는 LG화학 회사채 가격보다 더 비싸게 사려는 투자자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LG화학은 수요예측 흥행에 힘입어 이달 24일 최대 6000억 원까지 증액해 회사채를 발행할 예정이다.
올해 첫 회사채 발행 주자였던 포스코가 이달 6일 수요예측에서 대흥행을 기록한 뒤 공모 회사채 시장을 찾은 기업들은 줄줄이 흥행 기록을 쌓았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012450)(AA-), LG유플러스(032640)(AA) 등 신용등급이 우량한 기업들은 지난해 대비 수요예측 주문액이 각각 1조 원 이상 늘었다. 그 결과 현재까지 수요예측을 진행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모집액 대비 증액 발행에 성공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비상계엄 사태에 따른 투자심리 위축, 대규모 국채 발행 및 추가경정예산안 편성 가능성, 1분기 역대 최대 수준의 회사채 만기 물량 등을 근거로 기업들의 자금 조달 부담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지만 연초 효과가 예상보다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흐름은 신용등급 비우량, 비선호 업종 기업으로도 확산하는 추세다. 신용등급 ‘BBB+’급의 HL D&I(014790) 한라는 전날 710억 원어치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1560억 원어치 자금을 받아냈다. HL D&I 한라를 포함한 건설사들은 지난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로 수요예측 때마다 미매각이 발생했지만 올해는 달랐다. BBB급의 두산 역시 모집액의 8배가 넘는 자금을 모으며 증액 발행을 결정했다.
채권정보센터에 따르면 전 거래일 3년 만기 신용등급 ‘AA-’급 회사채와 3년 만기 국고채의 채권 시가평가 수익률 차이는 64bp였다. 비상계엄 직후 59.2bp(지난해 12월 4일)였던 신용 스프레드(회사채와 국고채의 금리 격차)는 지난해 말 68.4bp까지 확대됐으나 이달 초부터 축소 전환했다. 신용 스프레드 축소는 회사채 투자를 위한 자금 유입의 강도가 높아졌다는 의미다.
채권 전문가들은 연초 채권 발행 시장 강세 현상의 주요인으로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을 꼽았다. 전날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연 3%로 동결했지만 올 2월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은 높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 경우 상대적으로 표면금리가 높은 회사채를 매수하면 만기까지 보유하든, 자본 차익을 노리든 유효한 투자 전략이 될 수 있다. 김명실 iM증권 연구원은 “이르면 2분기 말 기준금리가 연 2.25%로 내려갈 때까지는 발행 시장이 강세를 보일 것”이라면서도 “금리 인하가 마무리되면 신용등급별 회사채 수요가 양극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설 연휴 이후 채권 발행 시장이 일부 변동장세를 보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원은 “올 국채 발행 규모와 추경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16조 원 내외의 국채 발행이 예상된다”며 “국채 발행 확대로 시장이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