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월 “모든 부담금을 제로베이스에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의 지시 2개월 만인 3월에 정부는 32개 부담금을 폐지 또는 감면하는 내용의 정비계획을 내놓았다. 윤 대통령은 당시 열린 ‘제23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그림자 조세인 부담금을 역대 어느 정부도 추진하지 못했던 과감하고 획기적인 수준으로 정비하겠다”며 “이번에는 한 번에 18개의 부담금을 폐지하고 14개 부담금은 금액을 감면해 국민의 부담을 확실하게 덜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윤 대통령의 전격적인 지시에 부담금 폐지가 추진됐다는 점에서 부담금 축소는 윤석열 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부담금 폐지는 정부 개입과 세금을 줄이고 민간의 영역을 활성화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색깔과도 들어맞았다.
부담금 개편은 이후 속도를 냈다. 지난해 5월에는 정부가 시행령 개정으로 가능한 부담금 12개 항목을 정비했고 7월에는 20개 부담금의 폐지와 완화 방안이 담긴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차일피일 시간을 끌더니 예산 국회에 접어들면서 부담금 논의는 뒷전이 됐고 비상계엄 사태를 맞으면서 우선순위에서 완전히 밀렸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당초 부담금 폐지를 추진할 때도 윤 대통령이 갑자기 지시해서 추진됐다는 점에서 뒷말이 있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야당이 윤석열 정부의 치적이 될 수 있는 부담금 개편을 돕겠느냐”며 “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들은 좌초했다고 보는 게 맞다”고 전했다.
실제로 연간 부담액이 지난해 징수 계획을 기준으로 총 3827억 원에 달하는 13개 부담금은 국회에서 반년 가까이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개발부담금의 경우 정부는 비수도권을 중심으로 침체된 건설 경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2024년 사업 인가분에 한해 수도권은 50% 감면, 비수도권은 100% 면제하기로 했다. 개발부담금은 개발 사업 시행자에게 개발 이익의 20% 또는 25%를 부과하는 부담금이다. 개발부담금이 감면·면제될 경우 2024년 기준 연간 3082억 원의 부담이 경감된다. 그러나 관련 법안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돼 있다. 정부는 2025년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올해도 개발부담금을 감면·면제하겠다고 했지만 국회에서 2024년 사업 인가분에 대한 부담금 감면도 이뤄지지 못한 상태라 올해 감면 여부는 불투명하다. 대한주택건설협회의 한 관계자는 “개발 이익이 결국 사업자의 수익인데 여기서 20~25%를 떼어 간다는 것이니 건설 업계에서는 부담이 상당하다”며 “정부 방침을 감안해 지방자치단체에서 실제로 부과하지 않더라도 법 통과가 되지 않아 정말로 감면을 받을 수 있을지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개발부담금과 함께 건설 업계의 대표적인 ‘준조세’인 학교용지부담금은 반쪽짜리 성과를 내는 데 그쳤다. 아파트 분양 가격에 전가된다는 지적에 정부는 당초 학교용지부담금 폐지 방침을 밝혔지만 교육 재정 결손이 날 수 있다는 야당의 반대에 부담금 부과 요율을 0.8%에서 0.4%로 낮추는 식으로 개정됐기 때문이다.
더 이상 불필요하거나 중복돼 폐지 필요성이 높은 부담금도 국회에 발목을 잡혔다. 연초 경작 지원 등의 사업을 위한 출연금은 국내 연초 생산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해 2001년부터 국내 담배 제조 업자에게 20개비당 5원씩 매년 140억~150억 원 규모로 부과돼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연초 생산 기반 안정화 사업은 이미 조성된 기본 재산의 자산 운용 수입만으로 재원 조달이 가능해진 상황이다. 이에 정부는 이 출연금을 폐지하기로 했지만 이에 대한 논의 역시 멈췄다. 부담금 성격에 맞지 않아 폐지하기로 한 집단에너지 공급시설 건설비용 부담금과 산업단지 시설부담금, 도로법 원인자부담금, 지자체 공공시설의 수익자분담금도 마찬가지다. 광물 수입부과금 및 판매부과금과 해양심층수이용부담금, 운항관리자비용부담금 등 역시 국회에 묶여 있다.
영화관입장권부과금처럼 폐지됐는데도 되살아나는 부담금도 있다. 정부 안팎에서는 야당이 국회를 주도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어 다른 부담금도 부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전문가들은 부담금 개편이 정치 논리로 인해 좌우돼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부담금은 행정부가 자신들의 편의 때문에 손쉽게 거둬서 쓰는 것인데 이는 부담금이 아니라 법적인 근거 아래서 조세로 충당하든지 해야 할 문제”라며 “불합리한 제도가 만연해 있다면 어떤 정부는 이를 고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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