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20일 오후(현지 시간) 워싱턴DC 캐피털원 실내 경기장. 트럼프 대통령은 경기장을 꽉 채운 2만여 명의 지지자들 앞에서 20여 분간 연설을 하고 단상 옆에 마련된 책상 앞에 앉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장 먼저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정책 78개를 뒤집는 명령에 서명하며 ‘1호 행정명령’으로 ‘바이든 지우기’를 택했다. 이례적 ‘서명식 쇼’에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새겨진 빨간 모자를 쓴 지지자들은 환호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팬미팅을 하듯 서명에 사용한 펜을 지지자들에게 선물로 던지는 제스처도 취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의 공언대로 취임 첫날 행정명령에 무더기로 서명했다. 이날 새로 열린 백악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서명한 행정명령은 총 26건이었다. 비교 가능한 1932년 이후 역대 최대치로 기존 기록은 바이든 전 대통령의 9건이었다. 트럼프 1기 때는 한 건에 그쳤다.
이날 내린 행정명령은 불법 이민자 추방, 에너지 패권 장악, 정부 개혁 등 미국인이 가장 지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와 접한 남부 국경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경에 군을 배치하기로 했다. 1기 때 건설을 시작해 전 정부 때 중단된 남부 국경 장벽 건설을 재개하고 출생시민권제를 폐지하며 불법 이민자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르면 사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주요 외신들은 이민과 관련한 행정명령이 가장 많았다고 전했다.
트럼프 경제정책 중 관세와 함께 핵심으로 평가되는 에너지 부문에서도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해 석유·천연가스 시추 등에 있어 각종 인허가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길을 텄다. 바이든 전 대통령이 임기 만료 직전 내린 미국 연안에서의 신규 석유·가스 시추를 금지한 정책도 뒤집었으며 역시 지난해 1월 중단된 액화천연가스(LNG) 신규 수출 심사 중단 조치도 백지화해 미국 LNG의 신규 수출길을 열었다. 환경보다 경제를 중요시한다는 신호를 주기 위해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재탈퇴했다. 트럼프 측은 미국 정부가 환경을 생각하느라 화석연료 시추를 자제해도 미국인의 에너지 수요는 줄지 않으며 결국 이란 등 원유를 생산하는 적성국의 배만 불린다고 판단하고 있다.
비대한 연방정부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만을 반영하듯 트럼프 대통령이 정부 개혁과 관련한 행정명령에 서명할 때마다 지지자들은 큰소리로 환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방정부 공무원들의 재택근무를 폐지하고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정착할 때까지 고용과 규제를 동결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또 일반직 연방정부 공무원도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면 새 정무직(스케줄F)으로 분류해 해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 무더기 행정명령을 내린 것은 집권 초기 국정 동력이 강한 시기를 놓치면 정책을 펴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 철저한 준비 없이 백악관에 들어가 초기의 ‘골든타임’을 놓쳤고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까지 터지며 어려움을 겪었다. 의회에서의 법 통과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행정명령을 통해 늦어도 중간선거가 예정된 2026년 11월까지 ‘마가’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변경하는 명령에도 서명했다. 또 취임사 등에서 파나마운하를 반환받고 그린란드가 국제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을 재차 언급, 신(新)제국주의적 면모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특히 중국에 대해 “(사실상) 파나마운하를 운영하고 있다”며 “그린란드 주변에 중국 선박과 군함이 도처에 있다. 그들(덴마크)은 그린란드를 유지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틱톡 금지법’의 시행은 75일 연장했다. 1·6 의사당 폭동 사태로 기소된 자신의 지지자 1500여 명은 사면 조치했다.
이 외에 세계보건기구(WHO)도 코로나19 때의 대응과 중국에 기울어져 있는 조직의 정치 성향 등을 문제 삼으며 2020년 7월에 이어 다시 탈퇴했다. 북미 지역 최고봉인 알래스카의 ‘다날리’ 명칭을 미국 25대 대통령이자 고율 관세 정책을 썼던 윌리엄 매킨리 전 대통령을 뜻하는 ‘매킨리산’으로 복원하기로 했다.
다만 무리한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내부 반발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공익법 전문 로펌 ‘내셔널시큐리티카운슬러’는 정부효율부가 내부 회의 등을 비공개로 진행해 연방자문위원회법(FACA)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시민단체 ‘퍼블릭시티즌’도 정부효율부의 지위가 불분명하다며 소장을 냈다. 미국시민자유연합(ACLU)도 출생시민권 폐지에 대해 소송장을 냈다. 미 수정헌법 14조에는 ‘미국에서 출생하는 사람은 미국 시민으로 규정한다’고 돼 있어 행정명령이 위헌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